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사실상 허용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내린 인수 불허를 수정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이다. 일본제철이 US스틸 지분을 100% 인수해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는 한편 미 정부를 상대로 핵심 경영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를 무상 발행하는 구조다. 다만 황금주가 향후 회사의 전략적 결정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15일(현지 시간) 니혼게이자이신문·아사히신문 등 일본 주요 매체들은 “일본제철이 US스틸 황금주를 미국 정부에 무상으로 발행하기로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황금주 발행은 일본제철이 전날 미국 정부와 체결했다고 발표한 국가안전보장협정에 포함된 내용이다. 협정에는 일본제철이 일정 기간 US스틸 공장을 폐쇄하지 않고 고용을 유지한다는 내용 등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황금주란 특정 주주가 단 한 주만으로도 회사의 주요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주식이다. 의결권 등 지분과 비례한 권한은 거의 없으나 정관 변경이나 주요 자산 매각, 지배구조 변경, 인수합병(M&A), 외국 자본 이전 등 핵심 경영 사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과거 유럽 각국의 공동 프로젝트로 출발했다가 2010년대 완전 민영화 및 단일 회사로 전환한 에어버스도 프랑스와 독일 정부를 상대로 황금주 발행을 검토했다.
일본 언론들은 일본제철이 US스틸 인수 조건으로 체결한 국가안전보장협정과 황금주가 추후 경영의 족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철강 업계를 둘러싼 경영 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황금주가 회사의 경영 자율성을 심각하게 제약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요미우리신문은 “(US스틸) 구조조정과 생산 재편 등 재건을 위한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지 않으면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할 수 없다”고 짚었다. 일본 민간연구소 니혼소켄의 이시카와 도모히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도 여러 압력을 가해올 것으로 예상되고 중요한 경영 판단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일본제철이 약속한 대규모 투자 금액 역시 향후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우려됐다. 일본제철은 2028년까지 US스틸에 110억 달러(약 15조 원)를 투자하고 이후에도 추가 자금을 투입해 총 140억 달러(약 19조 원)에 달하는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US스틸 주식을 전량 취득하는 데 소요되는 141억 달러와 비슷한 규모다. 당초 일본제철이 고려했던 US스틸 투자액은 27억 달러 수준이었다. 닛케이는 “투자액을 합치면 이제까지 일본 기업의 해외 기업 인수 사례 중 2위 규모”라며 “단기적으로 보면 ‘비싼 거래’라는 지적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우려에도 일본제철이 US스틸 인수를 강행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정책과 인구 감소에 따른 자국 시장의 성장성 저하가 배경으로 꼽힌다. 중국 업체들의 과잉생산으로 글로벌 시장에 저가 철강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수익성 확보를 위해 관세로 보호받는 미국 시장 진입을 노렸다는 분석에서다. 야마구치 아쓰시 SMBC닛코증권 시니어 애널리스트는 “미국 시장은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멀고 보호주의도 강해 수출만으로 공략할 수 없지만 내부자가 된다면 수익을 내기 쉽다”고 짚었다. 일본제철은 2025년 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연결 기준 전년 대비 36% 줄어든 3502억 엔의 순이익을 기록한 바 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