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극이 현실의 어두운 면을 소재로 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가 있다. 사회 비판 의식은 유지하되 관객에게 과도한 죄책감이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가벼워지면 본질이 흐려지고 너무 무거워진다면 관객이 외면한다.
연극계의 ‘스타 연출가’로 꼽히는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이 14년 만에 선보인 창작극 ‘유령’은 이런 창작자의 숙제를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무연고 사망자 195명에 대한 한 일간지의 기획 기사가 창작의 씨앗이 됐다는 이 작품은 제목처럼 세상을 유령처럼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주인공은 남편에게 매일 매를 맞다가 이러다 죽겠지 싶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친 여성이다. 이름과 성, 신분까지 몽땅 버린 채 식당과 일용직, 찜질방 등 삶의 가장자리를 맴돌다 끝내 중병에 걸려 홀로 쓸쓸히 사망한다. 죽으면 끝이라지만 여성의 인생은 그렇지도 않다. 무연고자로 죽은 여성은 시체 안치소에 방치된 채 유령이 된다. 연극 ‘유령’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살아서도 보이지 않고 죽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니. 이래서야 보는 이의 마음도 무겁다. 작품은 이 이야기가 연극임을 일부러 드러내는 ‘메타연극’ 기법을 활용해 절묘한 균형감을 찾는다. 일례로 인물들은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자신이 배우임을 밝힌다. 막이 오르면 주역을 맡은 배우 이지하가 등장해 관객에 말을 거는데 첫 대사가 이렇다. “저는 이번 생에서 배 씨, 정 씨, 그리고 다시 배 씨입니다. 무대에 섰으면 연극에서 맡은 역할을 말해야지 생은 무슨 생이야 하실지 모르겠네요.”
잔혹하고 불편한 장면이 나올 때도 연극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충격을 완화한다. 극 초반 가정 폭력 장면이 대표적인데 배우들이 ‘이제 맞는 장면을 해야지’라는듯 합을 맞추고 시작한다. 맞을 때마다 무대를 나부끼는 가녀린 배우의 몸은 바라보기 괴롭지만 곧바로 달려온 분장사가 배우 얼굴 곳곳에 붉은 멍을 그리며 관객을 현실로 데려온다. 극 중반부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배 씨가 임금을 착취당하는 불쾌한 장면도 통쾌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악덕 사장 역을 맡은 배우가 입에 담기도 힘든 모진 말을 쏟아내다가 “나도 이런 대사 안 좋아해. 이 대사 빼자고 몇 번이나 연출한테 말했다니까. 연출 나오라 그래”라며 판을 뒤엎는다. 현실과 무대가 뒤엉킨 이 소동극은 점점 강도를 더해가며 앞으로 이야기 전개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과 몰입도를 높여간다.
독특한 극의 구성은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라는 클라이맥스 대사를 통해 다시 한번 힘을 얻는다. 고 연출은 지난달 30일 연극 ‘유령’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막을 올린 후 기자들과 만나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생이 좀 연극 같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한다”며 “연극에서 내가 선택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삶의 괴로움 속에서도 어떤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는 독특한 클라이맥스 연출과 음악, 무대 의상 등에 대해서도 “그냥 그렇게 해야 할 것 같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는 답변을 많이 했다. 고 연출은 “글을 쓸 때면 한 번씩 본심이 살아서 그냥 죽 밀고 나갈 때가 있는데 이 작품이 특히 그랬다"며 “스스로도 뭐라고 하는 건가 싶은 순간들이 있기도 했지만 꼭 이래야 한다는 분별을 내려놓고, 이럴 수도 있겠다는 마음으로 즐겨주신다면 이 이야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우 이지하 역시 “이 작품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생각은 내려놓고 그냥 흐르는, 물과 같은 존재가 되자고 마음 먹었다”며 “연기를 하기보다는 이야기의 존재로서, 에너지를 가진 덩어리로 무대에 있자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어 연기가 다소 거칠어 보일 수는 있겠지만 진심은 전달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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