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희토류와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한 협력을 제안하며 ‘대(對) 중국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30일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전날 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약 25분간 전화 통화를 하고 경제안보 분야 협력에 대한 구상을 직접 전달했다. 미국 워싱턴 현지 시간으로 30일 진행되는 미일 관세 4차 협상을 앞두고 양국 정상은 두 차례 전화 회담을 가졌다. 지난 23일은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그리고 29일 통화는 이시바 총리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경제안보 협력에서 일본이 공략하는 부분은 희토류와 반도체 공급망 강화다. 이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본의 전략적 접근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 4월 미국의 ‘상호관세’에 대한 맞불로 7종의 희토류 대미 수출을 제한한 바 있다. 희토류는 전기차와 각종 첨단기술 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소재로, 중국의 수출 규제로 미국 내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23일 전화 회담 당시 이시바 총리에 희토류 등을 언급하며 경제 안보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요미우리는 “그동안 농산물 수입 확대, 미국산 자동차 수출 관련 비관세 장벽 개선 등을 제안해 왔던 일본은 경제안보가 유력한 교섭 카드가 될 것으로 보고 추가 협력 방안을 제시하는 쪽으로 방향이 기울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희토류 등 핵심 광물·반도체·조선 분야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핵심 광물 분야에서는 일본이 보유한 가공·제련 기술을 미국에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술력을 갖추고 인건비가 저렴한 제3국에서의 제련 협력도 논의 중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반도체 제조업의 미국 회귀 정책에 맞춰 반도체 제조장비 관련 협력을 강화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이 향상되고 일본으로의 수출이 늘어나면 대일 무역적자 감소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조선업에서는 중국이 신규 선박 건조량의 70%, 수리 부문의 90%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조선업 재건을 목표로 하는 트럼프 정부에 차세대 선박 공동 건조 등의 계획을 협상 테이블에 올릴 방침이다.
이시바 총리는 통화 후 기자들에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미일 협력을 한층 발전시키는 의견교환을 했다”며 “서로의 생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향후 수년간 수십조원 규모의 방위장비를 구매하겠다는 방침을 전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대부분은 이미 확정된 방위력 정비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구매·도입할 무기들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산 제품 구매 규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다. 아사히신문은 "미일 관세 협상 개시 전부터 구매 금액 규모를 내부 조율한 뒤, 4월부터 본격화된 협의 과정에서 미국 측에 이 내용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일본 방위력 정비 계획에 따르면 구매 대상에는 미국산 순항미사일 ‘토마호크’와 스텔스 전투기 ‘F-35A’ 등이 포함돼 있다.
그간 일본은 “관세 협상과 안보 문제는 분리해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시바 총리도 관련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대일 무역적자에 불만을 제기하자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 제품을 구매한다는 점을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번 제안의 의도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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