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촉진하고 원전 용량을 2050년까지 현재의 4배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인공지능(AI) 산업 급성장에 따른 전력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도 취임 첫해인 2017년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원자력산업을 다시 부흥하겠다고 선언했다.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34년 만에 준공된 보글 3·4호기 건설에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소형모듈원전(SMR) 부지를 선정하며 국가원자로혁신센터(NRIC)를 설립했던 것도 트럼프 1기 때다. 조 바이든 전임 행정부는 취임 첫해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원으로 탄소 배출 없는 원전을 명시했다. 정권은 바뀌어도 원전 육성은 미국 경제에 불가피한 전략이라는 판단 아래 계승해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원전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경제나 외교·안보 등 주요 분야에서 정권의 이념을 초월해 일관된 목표를 유지하고 있다. 바이든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각각 보조금과 관세를 활용한다는 접근법만 다를 뿐 미국 제조업 부흥이라는 공통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도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정치 갈등이 심한 나라로 평가받지만 핵심 국정과제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보여준다. 이런 기조는 전 세계 기업과 투자자들이 ‘미국은 큰 줄기에서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신뢰하는 밑바탕이 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대만 TSMC가 1000억 달러, 애플이 5000억 달러, 현대차그룹은 2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단행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5년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핵심 산업에 대한 중국 견제는 이어질 것이고 미국 내 투자 요구는 지속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또 단기 사업 전망은 불확실해도, 장기 투자처로서 미국의 매력이 높다는 평가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국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6월 4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외교·안보와 에너지 정책 등 주요 정책 방향은 후보마다 엇갈린다. 이재명 대선 후보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김문수·이준석 대선 후보가 원전 확대를 공약한다. 김 후보는 한미동맹을 중시하고 북한에 대한 강경 대응을 강조하는 반면 이재명 후보는 미중일러 간 균형 외교와 남북 화해 협력을 내세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야 간 견해 차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처럼 외교·안보·에너지와 같은 100년 대계를 좌우하는 핵심 정책이 5년마다 뒤집히는 나라는 매우 드물다.
해외 투자가들이 ‘코리아 리스크’로 꼽는 주요 배경 중 하나다. 배리 아이컨그린 버클리대 교수는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목표가 달라지기에 강력하고 지속적인 경제·외교 정책을 수립하기 어렵고 외국인투자가에게 일관된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5년짜리 국가 운영으로는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투자처, 전략적 파트너로서 매력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일침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부 정책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새로운 정책을 찾는 구태를 벗어야 한다. AI 시대가 오면서 주요국은 여야를 떠나 미래산업 육성을 국가 전략 수립의 중심에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픈AI, 소프트뱅크, 오라클의 AI 투자 유치에 나선 것도, 바이든 전 대통령이 트럼프 1기의 원전 육성을 계승해 확대한 것도 AI 시대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취지다.
곧 출범할 새 정부는 이념이 아닌 미래를 중심에 둔 정책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바뀌어도 정책 방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 예측 가능한 에너지·대북·외교 정책이 국가 경쟁력의 기반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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