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만~4만 년 전까지 지구에 살았던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무겁고 힘이 강했으며 뇌도 약간 더 컸다. 또 흰 피부와 크고 푸른 눈을 가져 햇빛 양이 적은 유라시아 지역 생존에 적합했다. 비슷한 시기의 ‘고인류’ 데니소바인은 저산소에 유리한 유전자 변이 덕분에 높은 곳에서도 잘 살았고 호모루소넨시스는 손가락·발가락 뼈가 구부러진 걸로 봐서 나무를 타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남은 생존 인류는 호모사피엔스 단 한 종이다. 왜 하필이면 호모사피엔스가 생존 경쟁에 승리해 지구의 지배자가 된 걸까.
이 미스터리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균’을 지목한다. 선사 이래 인류 종 간의 이종 교배 등 상호 작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각종 병원균이 서로에게 전파됐는데 이런 ‘균들의 전쟁’에서 다른 인류는 패배한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견뎌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왜 호모사피엔스가 선택됐을까에 대한 해답은 지역과 기후에서 찾는다. 약 3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생 인류는 열대 우림의 각종 동물과 함께 살며 그들이 전파하는 치명적인 병원균과 싸워 이겨낸 종이다. 약 4만~5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 대륙 등으로 이주해간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데니소바인과 만났을 때를 상상해보자. 조상 대대로 질병 부담을 안고 살았던 호모사피엔스가 창궐하는 전염병에 비교적 빠르게 내성을 가지는 동안 네안데르탈·데니소바인은 난생 처음 만나는 아프리카 병원균에 속수무책으로 스러졌을 것이다.
균의 침입과 저항이 인류사의 중요한 순간을 결정지은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의 풍요와 번영을 뜻하는 ‘팍스 로마나’도 병원균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았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례로 로마의 유명한 발명품 중 하나인 공중 목욕탕(떼르마이)은 사회·문화 교류의 중심지로 주목받았지만 온갖 수인성 질병이 퍼지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실제 설사병과 말라리아 같은 각종 풍토병이 수시로 창궐해 많은 로마인을 죽였다. 하지만 이 병원균들은 로마를 정복하러 온 외부인들에게도 ‘천연 장벽’ 역할을 했다. 6만 명의 대군과 37만 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도 말라리아에 걸려 로마 침략에 실패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제국의 쇠퇴도 균 때문이다. 제국이 번성하며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인도, 중국과의 장거리 무역이 증가했고 북유럽의 게르만족, 영국의 켈트족, 동유럽의 훈족 등이 잇달아 침입하면서 대량 살상 무기인 정체 불명의 병원균이 꾸준히 로마로 유입됐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줄줄이 유행했고 사망자가 늘며 제국은 차츰 약해졌다. 저자는 ‘신의 분노’라 불렸던 역병들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이 시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비를 베푼 기독교와 유대교가 일약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는 전기를 맞게 됐다고도 짚었다.
유전학과 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서술하는 책의 요지는 현대 세계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균’이라는 점이다. 역사의 생존자들은 가장 강하고 똑똑한 종이기보다는 전염병에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면역 체계를 가졌기에 살아남았다. 저자는 우리가 칭송하는 위인과 영웅도 사실은 병원균이 준 기회를 잡았을 뿐이라고 짚으며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 균열을 낸다. 농경인보다 수렵인들이, 고립된 정착인보다 모험적으로 이동한 이주민들이 상대적으로 튼튼한 면역력을 갖춰 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우가 많았다는 서사도 흥미롭다. 점차 높아지는 국가와 사회의 장벽이 균의 공격에 취약한 인류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2만 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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