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기세가 오늘날 같지 않았던 2007년의 일이다. 중유럽의 먼 나라 체코에 한국 문화유산 전시실이 처음 생겼다. 체코가 우리에게 낯선 만큼 그들에게도 한국은 아시아의 낯선 나라였을 터. 으레 있을 법한 개막 행사가 진행된 뒤 정작 놀랄 만한 일이 펼쳐졌다.
여느 평범한 주말 오후 박물관을 찾은 체코인들은 한국 교민들과 한·체코 친선협회가 마련한 소박한 행사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태권도 관람이며 한글 서예 체험, 김밥 나누기 등등.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은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다. 낯선 이국 문화를 편견 없이 즐기는 체코인들의 넉넉한 마음이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오랜 시간 시련을 겪어온 한국인들은 세계 무대 위에서 강고한 문화 정체성을 구축해온 일을 자랑스러워한다. 자존을 지키고 문화 영토를 넓히는 데 큰 보탬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문화를 세계 속에 널리 알리는 일에 적극적이다. 어느새 ‘교류’라 쓰고 ‘홍보’라고 읽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됐다. 모름지기 교류는 쌍방향의 소통을 의미할 테지만 실상은 한국을 외국에 알리는 일방향의 홍보에 집중한다. K팝·드라마 등 한류 문화가 전에 없던 인기를 누리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진다.
한류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인들은 세계 문화의 흐름을 선도할 좋은 기회에 다가서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커지고 있음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한류를 사랑하는 외국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얻고 이로써 상호 이해를 위한 진정한 교류를 펼칠 방안을 세워볼 수는 없을까.
한국의 박물관들은 민족문화 담론을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문화 기관으로 기능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편중이 오히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을 제약해온 일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에는 외국 문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국공립 박물관이 없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들이 일찍부터 세계 문화 전문 박물관을 운영해온 것과는 큰 격차가 있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자 국립민속박물관은 ‘세계로 열린 창’을 비전으로 삼고 2026년 말을 목표로 세계 민속을 소개하는 전시관을 준비하고 있다. 또 세종시에 들어설 박물관 단지에 2031년까지 새로운 청사를 지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할 본격적인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제껏 쌓아온 외국 문화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민속 문화를 조사·연구해 인류 문화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고르게 인식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우리의 국립박물관이 한국인들에게는 세계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이 되고 반대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이 되기를 진정으로 희망한다.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여러 사회와 문화도 결국 삶의 보편성 위에 서 있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의 삶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올해 어린이날을 맞이하면서 4~5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해외 13개 나라의 대사관과 문화원이 각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세계로 가는 놀이 기차’라는 이름의 세계 문화 잔치가 펼쳐진다. 미래를 열어갈 우리 어린이들이 오래전 체코의 그 어린이들처럼 외국의 다채로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자리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마음을 여는 바로 그 어린이들이 장차 세계를 누비며 세계시민으로 활약할 줄 굳게 믿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