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5000t급 신형 구축함 ‘최현호’ 진수식에 참석해 해군 구축함의 작전범위를 설명하면서 ‘중간계선해역’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지난 2023년 말 남북관계에 대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제기한 뒤 현행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하며 ‘해상국경선’를 언급한 이후 세 번째 서해 NLL의 불인정을 시사하는 것이라, 서해 5도에서 해상 경계선을 둘러싼 남북 간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고조 시키려는 모습이다.
앞서 2024년 1월 김 위원장은 북한 사회주의헌법에 “영토·영공·영해 관련 조항을 신설하고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재규정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어 같은 해 2월에는 “해상주권은 무력행사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 적들의 전투함선이 자주 침범하는 연평도와 백령도 북쪽 국경선 수역에서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할 것”이라며 “우리가 인정하는 해상 국경선을 적이 침범한다면 이는 무력도발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또 같은 달 14일에 신형 대함미사일 검수사격 시험을 지도하는 자리에선 연평도와 백령도 북쪽에 ‘국경선’을 그어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26일 김 위원장은 전날 남포조선소에서 열린 신형 구축함 진수식에 참석해 구축함과 순양함, 호위함 등으로 구성되는 원양 함대 창설 계획을 밝히고 “함선들을 연안방어수역과 중간계선해역에서 평시작전운용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 관영매체는 중간계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밝히지 않고 있어 그 의미가 불확실하지만, 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근거해 북한이 주장하는 새로운 해상 경계선을 설정하기 위한 명분 쌓기라는 관측이 나온다.
NLL은 물론 대한민국 영토인 서해 5도 기준 훨씬 남쪽을 일방적으로 그은 경비계선을 계속 주장하기 보다 국제법상 국가 간 영해가 중첩될 때 해상 경계를 새롭게 정해야 한다는 압박 전략의 시작이라는 평가다. 이를 위해 3차 연평해전 도발도 서슴치 않겠다는 발언 등 군사적 긴장감을 고조시켜 남한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포석이 담겼다는 분석이다.
군 관계자는 “국제법(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국가 간 12해리 영해가 중첩될 때 중간에 긋는 선을 중간계선해역이라고 한다”며 “북한이 그에 따른 경계선을 주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했다. 이 방식을 적용해 서해 5도 쪽에 선을 그으면 현재 보다 약간 남쪽으로 NLL 경계선이 생긴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북한이 주장하는 중간계선 주장과 관련해 우리 군의 입장은 확고하다. 유엔해양법협약은 1982년에 만들어진 일종의 관습법이고, NLL은 그보다 훨씬 앞서 6·25전쟁 종전 직후 지정됐기 때문에 NLL이 실질적인 남북 해상경계선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살펴 보면,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과 북한은 해상 경계선 범위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경계선 설정에 실패했다. 이에 유엔군은 1953년 8월 30일 서해 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와 북측 황해도 사이에 선을 긋고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했다.
문제는 1982년 채택된 유엔해양법은 국가의 영해를 기선에서 12해리까지로 규정하면서 남북 간 분쟁의 소지가 생겼다. 1953년에 유엔군이 설정한 북방한계선은 이 국제법 기준에 맞지 않는다. 북한이 국제법을 근거로 해상 경계선의 재설정을 주장하면 현재 소청도와 연평도에 이르는 북방한계선 이남의 일부 지역이 북한 영해에 포함된다.
다만 서해 해상 경계와 관련한 남북 간 협의가 있었다.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 11조에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남북 불가침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 10조에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계속 협의한다. 해상 불가침 구역은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지금까지 이어왔다.
그러나 두 합의서 조항 내용을 보면 지금의 북방한계선은 남북이 합의한 해상 경계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북한이 암묵적으로 인정해온 경계선이자, 6·25전쟁 이후 우리 군이 우월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실효 관할한 영역인 만큼 NLL이 실질적인 남북 해상경계선이라는 게 군 당국의 확고한 입장이다.
그 동안 북한이 주장한 서해 일대 해상 경계선은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1999년) △서해 통항질서(2000년) △경비계선(2007년) 등이 있다. 북한이 이번에 신설하려는 중간계선이 기존 경계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서 유추해보면 북한이 어떤 명칭을 사용하든 실질적 해상 경계선 역할을 해온 NLL보다 남쪽으로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관측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무엇보다 주요한 대목은 이처럼 북한의 NLL 무력화 명분 쌓기에 나설 때는 여지 없이 군사적 도발로 이어졌다는 우려다. 실제 두 차례의 연평해전은 남북 간 해상 경계 갈등을 전후해 군사적 충돌이 있어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우려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북한은 1999년 9월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발표하기 3개월 전 연평도 인근에서 ‘1차 연평해전’이 벌어졌고, 2000년에는 우리 선박이 백령도 등 서해 5도를 출입할 때 북한이 지정한 수로로만 이동하라는 내용의 ‘서해 통항질서’를 발표한 뒤 이를 우리 정부가 지키지 않았다고 2002년 ‘2차 연평해전’ 도발을 자행했다.
특히 북한이 이번에 선제공격 범위가 “그 어디, 그 어느 계선까지라고 국한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볼 때 적어도 NLL 인근에서 남북 간 무력충돌 위험성이 커졌다는 신호로 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중간계선은 NLL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김 위원장이 구축함 진수식 연설에서) 말미에 선제공격을 언급하면서 어느 계선에도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유사시 NLL 무력화 의도를 시현해 군사적 도발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김 위원장이 신형 구축함의 군함기를 동해함대사령부에 수여해 이 함정은 주로 동해에서 작전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제하면, 김 위원장이 언급한 중간계선은 북한과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중첩 수역을 의미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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