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를 23년간 통치하며 사실상 '21세기의 술탄'으로 군림하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야권을 탄압하며 종신 집권의 포석을 까는 가운데 서방 국가들의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튀르키예가 가진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서방은 그의 독주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묵과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0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최근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야권 대선주자 탄압 사태를 통해 그 이유를 지적했다.
더타임스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미 1990년대부터 민주주의를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만 타는 버스'에 비유하며 필요하면 언제든 민주주의를 버릴 수 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최근 그는 이 비유를 현실화했다. 튀르키예 당국은 지난 23일 제1야당 CHP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에크렘 이마모을루 이스탄불 시장을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그의 시장 직무를 정지시키고, 학위가 무효라며 대선 출마 자격까지 박탈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10년만의 최대 시위가 발발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은 '이마모을루의 자유'를 외치며 2013년 탁심 광장의 시위를 연상케 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현수막에는 "정의가 침묵하면 국민이 말할 것"이라는 문구가 등장했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부는 시위 참가자 약 1900명을 구금하고 내외신 기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는 등 탄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에르도안이 이렇게 강경한 독재 행보를 이어갈 수 있는 배경은 튀르키예가 서방 국가들에게 전략적으로 필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1952년 창설 직후부터 튀르키예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러시아 흑해함대의 지중해 진출을 막을 수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란 등 주요 갈등 지역들과 직접 맞닿아 있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여기에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튀르키예의 전략적 가치는 더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튀르키예군은 35만 명으로 미국 다음으로 큰 나토 내 2위 규모이며, 자체적으로 생산한 바이락타 드론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등 방위산업 강국으로서 나토의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시리아와 아제르바이잔 등 주변 국가에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나토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역사적으로도 튀르키예의 여러 차례 쿠데타나 민주주의 퇴행을 눈감아줬다. 이같은 사정을 잘 아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개의치 않고 야권을 탄압하고 시위대를 강경 진압해 종신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4일 "튀르키예 내의 혼란을 세계가 못 본 척 할 것이라는 데에 에르도안이 베팅했다"는 기사에서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졌고 법원들도 통제되고 있으며, 23년간 집권 후 에르도안은 종신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근동정책 연구소의 튀르키예 프로그램 책임자인 소네르 카갑타이는 에르도안 정권의 야당 탄압에 대해 "글로벌 환경이 에르도안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쪽"이라며 "유럽이나 미국으로부터 의미있는 반발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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