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고위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기자가 포함된 민간 메신저 ‘시그널’에서 군사 작전을 논의한 이른바 ‘시그널 게이트’ 파문이 워싱턴 정가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를 단순한 보안 실수가 아닌 대통령 참모진의 안보 의식과 체계 자체가 흔들린 ‘최악의 보안 참사’로 보고 있다.
27일(현지 시간)까지 나온 외신 보도들을 종합하면 사건의 발단은 지난 15일, 마이클 월츠 국가안보보좌관이 예멘 후티 반군 공습과 관련한 논의를 위해 시그널 채팅방을 개설하면서부터다. 이 방에는 피터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포함한 주요 안보 당국자들이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애틀랜틱 편집장 제프리 골드버그가 실수로 초대됐다. 이후 그에게 군사 작전의 구체적 시간과 전투기 출격 계획 등 기밀 사항이 전달됐다.
헤그세스 장관은 “오후 12시15분 F-18 전투기 출격, 오후 1시45분 드론 및 추가 타격, 오후 2시15분 목표물 공격” 등 상세 정보를 메시지로 공유했다. 단순한 상황 공유가 아닌, 작전 시간과 수단을 낱낱이 공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 정보가 외부로 유출됐다면 후티 반군이 도피하거나 미군 조종사가 위험에 처했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시그널 게이트’ 파장은 연일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CBS는 26일 위트코프 미 특사가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해당 채팅방에 초대된 정황을 보도했다. 그는 러시아에 도착한 지 12시간 만에 ‘후티 PC 소그룹’ 채팅방에 추가됐고, 이후 채팅방에서는 군사 작전이 논의됐다. 러시아가 시그널 침투를 시도해온 이력이 있는 만큼, 기밀 노출 가능성이 더욱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백악관은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위트코프 특사는 모스크바 체류 중 정부 제공 보안 기기만 사용했고, 개인 기기는 접근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위트코프 역시 X(구 트위터)를 통해 “보안 전화 외엔 어떤 기기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존 랫클리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상원 정보위원회의 ‘연례 위협 평가’ 청문회에 참석해 “합법적이었고 기밀 정보는 없었다”고 말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시그널 자체가 안전한가’라는 기술적 논쟁보다도, 그러한 플랫폼에서 기밀 정보를 주고받은 행위 자체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이버 보안 전문가 닐 애시다운은 “민간 앱을 쓰면서 기밀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정책과 절차에 부합했는지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상원 정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마크 워너 상원의원은 “시간, 장소, 사용될 무기 유형을 상세히 쓴 것이 기밀이 아니라면, 행정부는 미국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것인가”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을 반박했다.
미국의 고위 안보 당국자들의 연락처가 온라인상에 공개되어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AFP통신에 따르면 독일 매체 슈피겔은 26일(현지시간)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털시 개버드 국가안보국장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휴대전화 번호와 개인 이메일 주소 등이 온라인상에 노출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휴대전화 번호는 인스타그램이나 구인 플랫폼인 링크트인 프로필, 클라우드 저장소 서비스인 드롭박스, 사용자 위치 추적 앱 등과 연동돼 있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특히 왈츠 보좌관과 개버드 국장의 전화번호는 메신저 앱인 왓츠앱과 시그널 계정과 연동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왈츠 보좌관은 시그널 채팅방에 시사주간지 디 애틀랜틱의 편집장인 제프리 골드버그를 초대한 실수를 저질러 ‘시그널 게이트’의 중심에 서있다.
슈피겔은 이들의 연락처가 온라인상에 노출된 만큼 그들의 기기에 감시용 스파이웨어가 설치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로저 워커 상원의원과 민주당 간사 잭 리드 상원의원은 트럼프 행정부에 서한을 보내 감사원 조사를 촉구했다.
여론도 심상치 않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25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5976명 중 74%가 이번 논란을 ‘심각하다’고 평가했고, 이 중 53%는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다. 이는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이나 트럼프 대통령, 조 바이든 대통령의 기밀문서 유출 논란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논란이 확산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채팅방에 기밀은 없었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폴리티코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는 월츠 보좌관을 두둔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크게 분노하고 있다”며 향후 논란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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