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폭싹 속았수다’가 화제다. 제주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당차고 요망진(야무진) 반항아’ 애순이와 ‘우직하고 헌신적인 팔불출 무쇠’ 관식이의 사랑과 시련, 모험, 희망 등이 담긴 삶을 풀어낸 넷플릭스 드라마다. 제주 방언인 ‘폭싹 속았수다’는 ‘매우 수고하셨습니다’ 또는 ‘엄청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삶이 당신에게 귤을 줄 때)’이다. 미국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의 명언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삶이 당신에게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에서 따왔다. 긍정적 자세로 시련을 극복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 말은 정치권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잇따라 탄핵소추안이 기각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등에 대해 여권에서 “폭싹 속았수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거대 야당의 줄탄핵 폭주와 헌재의 탄핵 심판 지연 등으로 석 달가량 고생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26일 선거법 위반 사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서도 야권에서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진짜로 폭싹 속은 사람들은 우리 국민들이다. 계엄·탄핵 정국 속에서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국민들의 속은 타들어갔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이 대표가 이끄는 민주당의 연쇄 탄핵이 정면충돌하면서 정치가 제 기능을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가 궤도를 이탈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지난 대선에서 초접전을 벌인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계속 ‘대선 2라운드’ 같은 기싸움을 벌여왔다는 점이 거론된다. 범죄 수사를 하듯이 밀어붙이는 ‘검사 스타일 리더십’이라는 지적을 받는 윤 대통령과 12개 혐의로 5개의 재판을 받으면서 사법 리스크에 빠진 이 대표가 사생결단으로 싸워왔다. 여야 수장이 벼랑 끝 대결을 벌여온 근본 원인은 이례적인 ‘이중권력’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극심한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에 따라 확연히 분리된 행정 권력과 의회 권력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세력과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이 온갖 무기들을 총동원해 치킨게임을 벌여왔다. 정치 양극화와 국론 분열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국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이제는 쳇바퀴 정쟁을 멈추고 정치를 정상화해야 할 때다. 그래야 폭삭 속은 국민들의 아픔을 덜어줄 수 있다. 정치를 정상 궤도로 돌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동반 퇴진론이 제기된다. 하지만 주연 배우 한두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온다고 해서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수 여당 출신 대통령과 거대 야당이 협치를 내팽개치고 정면 대치하는 4류 정치 구도를 끝내는 게 중요하다. 서로 발목만 잡는 정치 지형에서는 나라 미래와 경제를 위한 개혁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정책과 입법들은 역시 표류할 수밖에 없다. 특히 특정 정당이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무력화할 정도의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면 입법·탄핵 폭주를 막을 길이 없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감시·견제하는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권력 구조를 바꾸는 ‘원 포인트’ 개헌을 하자는 제언이 나와 주목된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을 비슷한 시기에 치를 수 있도록 조정하면 지나치게 기울어진 여소야대 구조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헌법을 당장 개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선 선거·정당·의회 제도를 수술해 양대 정당 속에서도 ‘버퍼존(완충지대)’을 만드는 방안이 있다. 각 정당의 득표율에 가깝게 의석을 배분할 수 있게 선거제도를 바꿔야 승자 독식 구조 폐해를 줄일 수 있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역구 득표율 차이는 5.5%포인트(50.6% 대 45.1%)였으나 전체 의석수는 175석(58.3%) 대 108석(36.0%)으로 엄청나게 벌어졌다. 민주주의 가드레일로 불리는 ‘상호 관용’과 ‘절제’의 자세를 여야 정당과 지지층이 실천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정치를 복원하고 국력을 결집해 경제·안보 복합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폭삭 속은 국민들에게 정치권이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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