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자프로농구(WKBL) 출범 후 챔피언결정전 우승 감독은 모두 남성이었다. 이옥자, 유영주 등 유명선수 출신 감독이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왕좌는 번번이 그들을 외면했다.
올해 첫 역사가 쓰였다. 부임 4년 차에 불과한 ‘새싹 감독’이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둑을 무너뜨렸다. 여자농구 국가대표 부동의 포워드 출신으로 부산 BNK의 첫 번째 우승을 지휘한 박정은(48) 감독이다.
박 감독이 이끄는 BNK는 아산 우리은행과의 2024~2025 WKBL 챔프전(5전3승제)을 이달 20일 3전 전승으로 끝내고 창단 첫 우승에 골인했다. 23일 전화 인터뷰한 박 감독은 “돌이켜보면 그 어떤 시즌보다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정말 긴 시즌이었는데 우승으로 마무리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꼴찌 BNK의 선전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진안, 김한별 등을 내보내고 박혜진, 김소니아 등을 자유계약선수(FA)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낮아진 높이가 문제였다.
하지만 박 감독은 박혜진과 안혜지 등 유능한 가드진을 믿고 전술을 바꿨다. 포스트 플레이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다섯 명 전원이 한꺼번에 뛰면서 공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토털 바스켓볼’을 시도했다. 박 감독은 “높이의 농구보다 스몰 라인업을 추구하는 미국프로농구(NBA) 팀의 경기와 우리 남자프로농구(KBL) 경기를 꾸준히 보고 공부하면서 해법을 찾으려 했다”고 돌아봤다.
과감한 시도는 대성공이었다. 시즌 내내 우리은행과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인 끝에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용인 삼성생명을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잡아냈고 챔프전에서는 통산 11번째 통합 우승을 노리던 우리은행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박 감독은 “베테랑 박혜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전술이었다. 본인의 플레이를 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우승까지 이끌었다”고 공을 돌렸다.
BNK의 기막힌 반등은 이른바 ‘언니 리더십’ 덕이 컸다. 언니처럼 세심하게 선수단을 관리했는데 작전 타임 때는 실제로 “언니가 볼 때는” “언니가 생각할 때는 말야”라며 ‘언니’를 붙여 편안하게 다가갔다. 부담 없는 작전 지시 덕인지 선수들은 시즌 내내 자신의 기량 이상을 뿜어냈다.
박 감독은 이번 우승으로 2개 ‘최초 타이틀’의 주인공이 됐다. 첫 여성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 외에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도 최초다. 그는 국가대표로 네 번의 올림픽에 참가했고 프로 무대에서도 19년 동안 다섯 차례나 우승을 경험했다. 박 감독은 “리그에서 직접 뛰어본 선수가 지도자가 돼 지금 그 리그를 뛰는 선수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선수 출신 여성 지도자만이 가지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지도자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남편이자 ‘BNK 1호 전도사’ 배우 한상진(47)씨에 대한 고마움도 이야기했다. 박 감독의 선수 은퇴식 때 주인공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 화제가 되기도 했던 아내의 열혈 팬이다. 한씨는 챔프전 3경기도 모두 ‘직관’하며 아내와 BNK를 열렬히 응원했고 우승 순간 누구보다 기뻐했다. 박 감독은 “선수 때부터 지금까지 오래 옆자리를 비워야 하는데도 매번 불평보다 응원을 보내줘 항상 힘이 된다”며 “남편은 여자농구를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해 어디를 가든 ‘농구감독 박정은’과 BNK를 홍보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 팀과 여자농구 팬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다.
박 감독의 시선은 벌써 다음 시즌에 가 있다. 왕좌는 차지하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쉬는 것보다 다음 시즌 구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챔프전까지 치르면서 가장 늦게 시즌을 끝냈기 때문에 선수단 정비 등 할 일을 마무리한 뒤에 짧은 휴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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