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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23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사진 제공=파크컴퍼니




23. 고도를 기다리며

어디선가 숨소리가 들렸다. 아니,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 새벽에, 무슨 숨소리일까.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내 숨소리는 아니었다. 내 숨은 몸 안에 들어있어서 들리지 않았고, 내 상체를 부풀렸다 가라앉혔다 할 뿐이었다. 들리는 숨소리는 내 몸 밖에서 나는 것이다. 더구나 내 숨보다 두 배 정도 주기가 빨랐다. 위층이나 아래층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새벽의 조용한 기운 때문에 내려왔거나 올라왔을 수도 있었다. 새벽에 부부가 나누는 애정의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소리는 분명 내 침실에서 났다. 분명 내 곁에, 내 귓가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확실하게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나는 그 근원지를 탐색하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나는 잠을 깊이 자기 위한 캐노피 침대를 사용한다. 마치 유럽의 왕실 침대처럼 프레임을 세우고 천을 덧씌워 방의 시야를 가린 것이다. 한국의 모기장도 캐노피 침대를 닮았지만, 침대의 캐노피에는 아주 부드러운 천이나 장식이 달려있어 창문을 통해 바람이 흘러들면 미세한 소리가 날 때가 있다. 지금은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다. 더구나 이 소리는 사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생명이 내는 소리다. 파리나 모기도 아니다. 고양이나 개가 들어왔을 리도 없다. 나는 침대 프레임 위로 걸쳐놓은 긴 망사 천을 들추어보았고, 덮고 있던 이불 밑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서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베개였다. 내가 밤새도록 베고 잔 베개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베개에 다시 귀를 대보았다. 베개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베개 앞뒤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베갯잇을 열어 안도 살펴보았다. 베개를 두드려도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활발하게 베개를 까뒤집고 털은 후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숨소리는 가라앉아 멈춘 상태였다. 나는 제자리에 베개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이른 새벽에 깨어서 별일을 다 겪는 것 같지만,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많이 놀라는 사람은 아니다. 우리의 가시적인 것을 넘어서는 미스터리 한 일들이 우주에는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매일 아침 베개는 숨소리를 내었는데, 오늘만 내가 들었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 때 이런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을 때, 또래들은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당시 젊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첫 발령지인 튀니지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들의 몰이해가 이해되었다. 서로 언어 소통이 잘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에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 에너지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바퀴벌레나 심지어 베개도 다른 에너지를 뿜어낸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들은 서로 만나고, 튕겨 나가거나, 서로 섞인다. 이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을 물리학은 알고 있다. 모든 물질은 분자여서 끊임없이 서로 경계 없이 섞이고 있다. 내 머리카락의 분자와 공기의 분자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게 섞이고 있을 것이다.

내 숨소리가 베개에서 난 이유는 간단하다. 내 숨의 미소한 일부를 베개가 빼앗았기 때문이다. 나는 허약해졌고, 피폐해졌으며, 희망을 잃고 허망한 상태다. 베개는 나를 받치는 역할을 하면서 도리어 약해진 나에게서 에너지를 흡수해서 스스로 강해졌을 것이다. 베개는 내 숨을 가장 먼저 마실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더구나 내가 잠든 시간은 절호의 기회였다. 내가 내 숨결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베개에게 빈틈을 보인 것이다. 내가 다른 사물들보다 강한 에너지를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베개의 숨소리가 내 숨보다 빨랐던 것은, 사물 주제에 사람의 숨을 감당해내려니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내가 뺏긴 것은 숨만이 아니었다. 특권처럼 누리던 신사의 품격이 거의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장례식을 끝내고 나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와 다른 위치로 내가 자연스럽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보다 죽음 후에 사람들에게 더 존경을 받았다.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몇 나라들의 심장병 아이들을 위해 아버지는 유산 전액을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기셨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귀중한 것이 있다고 어머니가 따로 말씀하셨지만, 아버지가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전달할지는 어머니도 모른다고 했다. 침대 프레임에 걸터앉아 있으니, 하루아침에 털이 다 뽑힌 새 같았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던 십자매 ‘도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베란다의 새의 정원으로 나갔다. ‘도리’가 혼자 베란다 정원의 포도나무 가지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면 강아지처럼 흔들던 하얀 깃털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랫소리도 슬픈 울음소리도 없었다. 세상사의 명예에 목을 매달 때라면, 짝을 잃어 목소리를 잃은 버린 ‘도리’의 상태를 글로 써서 일간지에 당장 내놓았을 것이다. 독자들은 신기해하며 인간보다 낫다는 반응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독자의 반응을 즐겼을 것이고, 한두 출판사는 내 새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도리’의 슬픔을 내 명예나 경력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도리’는 나처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상태였다. 내 고통과 슬픔이 오죽하면 내가 베개에게 숨을 빼앗겼을까. 먹이를 줘도 ‘도리’는 날아서 가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양 눈이 옆으로 붙어 있는 탓에, 나를 더 잘 보기 위해 사시처럼 눈을 떠든 귀여운 모습도 사라지고 없었다.



장례식 기간을 포함하여 지난 2주간의 일정은 저절로 취소되었지만, 앞으로 이 주간의 일정은 내가 문자로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해외문학 독서토론회에서 요청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초청 강연과, 희곡집들만을 파는 ‘아름다운 고집’이라는 작은 서점에서 있을 작은 공연 관람도 취소했다.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3개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빌미로 양해 메시지를 보냈다. 일방적인 취소임에도 위로의 메시지와 함께 이해한다는 답장들이 돌아왔다. 아파트 인터폰이 울려서 나가보았더니, 우편함이 넘쳐서 관리실에서 플라스틱 바구니에 우편물을 모아서 내 아파트 문 앞에 놓았다고 했다.

나는 우편물을 아파트 안으로 끌어넣고, 시계를 보았다. 7시 30분에 가까웠다. 나는 아파트주변을 조금 산책하고 싶었다.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내 아파트 건물 앞과 옆 건물의 공터를 왕복해서 걸었다. 공터의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정자 옆을 지나가고, 다시 돌아서 내 결핍의 정자 옆을 지나갔다. 누군가 내려다본다면, 공터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반복해서 오가며 매우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이 목적없는 왕복 산책을 하다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했다던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올림픽에서 한 선수가 자신의 표적이 아니라 경쟁자의 표적에 사격한 실수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나서, 내가 삶의 과녁을 잘못 조준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마저 전했다. 이 되돌이표 아침 운동도 과녁이 없는 행동임에는 분명했다.

과녁은 없다 해도,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왔다 갔다 걷고 있었지만, 정자 옆 빈터를 계속 확인했다. 그곳에 서 있던 여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이 아파트 안에 사는 여자인지 방문한 여자인지, 나와 같은 아파트 동에 사는 여자인지, 옆 동에 사는 여자인지,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만나면 어떻게 할지, 히드라처럼 얽히는 정서적인 감정이 치밀고 올라왔다. S와 이별 이후에 이렇게 간절히 원한 여자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들떠서 이렇게 헤매는 것부터가 과녁이 없는 화살 상태였다. 올림픽에서 경쟁자의 과녁에 발사한 선수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화살을 쏘려는 이 비참한 한 남자의 행동은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상의 모든 성공과 성취를 내려놓았는데도, 내가 왜 이렇게 분주한지 알 수 없었다. 공허함을 채우려고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럴수록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인물 같았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는데, 고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다시 방향을 틀어서 걸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산울림 극단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외국을 떠돌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한 곳이었다. 한국처럼 빠르게 변하는 나라에서 내가 어릴 때 본 극단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경제적 효용성이 적은 극단을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연극을 매우 사랑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지 가보고 싶었다. 연약한데도 도도하게 부서지지 않은 것을 보고 싶었다. 내가 믿었던 세계와 내가 세운 세계가 차례차례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나서, 부서지지 않는 것을 갈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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