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어진 기분이다.”(1997년 작가 노트 중에서)
2018년 작고한 김인겸 작가는 공간을 다루는 조각가로 불린다. 그의 조각은 형태나 덩어리감(매스)이 중심이 되는 통상의 조각과 달리 평면을 접고 쌓아 입체를 구현하는 독특한 작법을 따른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평면적 이미지와 입체적 조각의 경계에 서서 감춰진 공간을 드러내고 바라보는 관람객들에 그 깊이를 사유하게끔 이끈다.
공간을 조형하는 작가의 특별한 작법이 완성된 곳은 약 30여 년 전의 프랑스 파리다. 김인겸은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첫 한국관이 개관하던 당시 곽훈, 윤형근, 전수천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참여했다. 인상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여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는 1996년 퐁피두센터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건너갔고 10여 년을 머물렀다. 예술가에게 파리의 생활은 여러 영감을 줬겠지만 조각 작업에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고 한다. 작업실 크기도 작았고 재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 눈에 띈 재료가 종이다. 이방인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일반 종이부터 잡지와 신문 등의 각종 지류를 접고 자르고 다시 붙이는 과정에서 작가는 새로운 조형 언어를 발견한다.
대구 봉산동 우손갤러리에서 6일부터 열리는 김인겸의 개인전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에서는 작가가 파리에 정착하면서 구축한 ‘접기’라는 조형 방식이 잘 구현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실제 전시장의 벽면에는 마치 종이처럼 접히고 겹치며 휜 듯한 녹슨 철판 조각들이 눈길을 끈다. 전시장 입구 등에 자리한 육중한 대형 조각들 역시 기다란 종이를 접고 찢은 듯 날렵한 형태를 띄고 있다. 특히 스테인리스 스틸을 반원 형태로 제작해 빛을 모두 흡수하는 블랙미러로 안쪽을 채운 ‘빈 공간(emptiness)’ 연작은 접히고 중첩된 평면이 빚어내는 특별한 공간감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장에서는 작가의 인장과도 같은 ‘스퀴즈(밀대)’ 작업들도 만날 수 있다. 먹물과 아크릴 물감이 흠뻑 적셔진 밀대가 종이 위를 지나며 남긴 넓은 면과 투명하게 중첩된 흔적들이 전시장 곳곳에 내걸렸다. 작가의 딸이자 전시 기획자인 김재도 미술평론가(홍익대 초빙교수)는 “프랑스에서 낯선 이방인이 접근하기 쉬운 소재가 종이였고 스퀴즈였다”며 “스퀴즈 작업을 통해 작가가 추구하던 맑고 투명하면서도 레이어드(중첩)된 공간감을 발견했고 작품 전환의 큰 계기를 맞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가 남긴 메모 중에는 ‘긴 시간 작업을 했지만 남긴 물리적 작업이 많지 않다. 작품이 완성되는 동시에 떠나고 있기에 그렇다’는 내용이 있다”며 “자기 작업을 완성해가면서도 항상 기존의 작업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했던, 언제나 변화를 추구했던 작가를 이번 전시에서 만나봐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는 대구에서 20년 만에 열리는 김인겸의 개인전이라는 점에서도 뜻 깊다. 작가는 2005년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파리에서의 작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개인전을 연 바 있다. 이번에도 당시 전시에 출품됐던 작품들을 대거 소환했다. 김 평론가는 “작가와 대구와의 인연은 당시 시공갤러리 이태 대표의 작고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다시 한번 인연을 재개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밖에도 전시에서는 설치 형식의 ‘프로젝트’ 시리즈에 해당하는 1995년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과 1992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 전시작에 관한 영상과 자료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제작한 영상을 통해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당시의 모습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4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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