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인공지능(AI) 산업의 승자가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 경제학자들의 대답은 대체로 미국으로 좁혀진다. 단순히 오픈AI나 엔비디아와 같은 ‘챔피언’ 기업을 보유하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AI라는 산업이 국가 잠재성장률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사정은 다르지만 막대한 보조금을 쥔 중국도 유력한 승자 후보 중 하나다.
잠재성장률은 한 국가의 자본과 노동으로 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성장률을 의미한다. 강력한 재정지출로 단기간 국가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도 있으나 이 경우 물가가 오르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때문에 잠재성장률이야말로 ‘일회성 진통제’ 효과를 제거한 국가 경제의 진짜 실력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실력은 이미 전 세계 바닥 수준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자본 지출(설비투자)이 급격히 줄어든 데다 인구구조까지 늙어 현재 연간 잠재성장률이 2%를 밑돌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5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올해 1.5% 성장이 한국의 실력”이라면서 “구조조정을 제때 하지 못해 혁신 산업을 키워내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구조조정 지연의 기저에는 노동생산성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경직적 노동 규제로 생산성 개선까지 가로막혀 저성장의 비탈로 굴러떨어지고 있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51달러로 회원국 37개국 중 26위다. 1위 미국(83.6달러)의 60% 언저리에 그치고 있다.
문제는 AI 발전 속도가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는 점이다. 특히 AI와 휴머노이드의 결합이 파괴적이다. AI 두뇌를 단 로봇이 인간 대신 미국이나 중국의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공상과학(SF) 영화 같은 광경을 10년 내에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상당수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런 생산성 대격변을 대한민국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계에서는 “공장에 로봇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 민주노총과 손잡은 국회의원들이 즉각 로봇세(稅)를 도입하지 않겠느냐”는 자조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잠재성장률의 또 다른 구성 요소인 자본 격차 문제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민간기업들이 내놓은 AI 투자 프로젝트 규모만 해도 벌써 5000억 달러(약 730조 원)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우리나라가 이제서야 “연내에 AI 칩 1만 장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비교하면 그 격차가 얼마나 큰지 체감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곡괭이’가 있다. 미 서부 개척 시대 때 금광 소유주보다 곡괭이 유통업자가 더 많은 돈을 벌었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이야기다. 그러나 곡괭이는 결국 도구일 뿐 이를 통해 끌어올릴 수 있는 성장률에는 한계가 있다. 대표적인 곡괭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출하는 연간 설비투자 비용을 다 합쳐도 70조 원 안팎에 불과하다. 민간에서만 730조 원을 투자해 근원적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미국이나 연간 100조 원 이상의 반도체 보조금을 투입하는 중국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생산성 개선도 어렵고 과감하게 돈을 풀 여력도 없는 한심한 실력의 경제가 쳐다볼 곳은 결국 하나, 한국은행뿐이다. 주요 경제 부처와 국책연구기관들이 금리 인하를 합창하는 배경에는 이 같은 근본적 원인이 있다. 그러나 재정지출 대신 제로금리를 선택한 일본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나. 저성장의 ‘잃어버린 30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게 한국이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허리띠 졸라매기를 통한 ‘선택적 재정 확대’뿐이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데도 국세의 20.79%를 강제로 떼어가는 교육교부금이나 선거 때마다 무분별하게 지어지는 지방 공항·철도 등에 대대적 수술을 가해 AI에 투자해야 한다. 그게 글로벌 AI 경쟁에서 꽁무니라도 쫓아가는 유일한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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