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이해욱 DL그룹(옛 대림산업) 회장은 호텔 브랜드 ‘글래드’ 상표권을 개인 회사에 넘기고 31억 원의 브랜드 수수료를 챙긴 혐의로 기소됐다. 이 회장이 재판에 넘겨진 것은 2011년 상법 개정과 관련이 깊다. ‘이사의 자기거래와 회사 기회 유용 제한’이 포함된 상법이 통과되면서 검찰도 이를 바탕으로 이 회장에 대한 수사를 본격 진행할 동력이 생겼다. 재판 4년 만에 이 회장은 대법원에서 2억 원의 벌금형이 확정됐다. 비슷한 시기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도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계열사에 대한 부당 지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4년 전 상법 개정이 일으킨 연쇄효과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 전체로 확대하는 내용이 담긴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될 경우 기업 활동 전반에서 사법 리스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 역시 한국경제인협회와 관련 내용을 협의하는 등 상법 개정 통과 이후 상황에 분주히 대비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마저도 “(상법 개정안이 통과할 경우) 이사 충실의무가 주주에게 확대되는데 이 경우 수시로 의사결정할 때마다 고발과 수사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법조계는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까지 확대되면 회사에 직접 손해가 없더라도 특정 주주가 피해를 입으면 의무 위반 소지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배임죄 성립 요건이 과거에는 ‘회사의 손해’였지만 앞으로는 ‘주주의 손해’도 문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회사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대해 형법상 처벌할 근거는 배임죄뿐이다. 그동안 총수나 경영진이 배임죄로 기소돼도 피해자는 회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개정 상법이 시행되면 피해자가 주주로 확대될 수 있다. 대형로펌의 한 상법 전문 변호사는 “현재 주주가 배임 혐의로 경영진을 고소하면 손해배상 역시 회사에 대한 것”이라며 “(새로운 상법 시행 시) 주주가 직접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형사적으로도 피해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도 이번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기업 수사가 무분별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한경협 관계자는 “기업의 경영 판단에 대한 배임죄 처벌이 막중한 상황에서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까지 확대하면 기업은 소송 리스크 확대로 기업가정신 발휘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검찰은 상법 개정으로 수사 범위가 늘어나면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사회의 결정으로 주주들에게 손해가 되고 총수 일가에게만 이익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배임죄 적용 말고는 없다”고 설명했다. 2011년 회사법 개정에 따라 대기업 총수에 대한 ‘부당 지원’ 기소가 늘어난 것도 이 같은 설명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검찰 내부에서도 상법 개정이 ‘소액주주 보호’라는 본 취지를 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중앙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특정 주주가 이익을 취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해서 배임죄 성립 여부는 사건마다 다를 것”이라며 “(상법 개정안의 취지인) 소액주주 보호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2011년 상법 개정안 통과 이후 기소된 각종 부당 지원 사건과 달리 이번 상법 개정안의 경우 주주의 대한 책임이 모호하고 주주의 특정 문제도 많아 사정 당국의 수사와 기소에도 큰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기업인이 의사결정을 할 때 모호한 주주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하니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사가 다양한 주주의 이익을 확인하고 합치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이 때문에 신속한 경영 판단을 저해해 기업 경쟁력이 하락할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그럼에도 상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기업인의 형사적 처벌 가능성은 높은 상황이라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같은 의견에 정부도 타협점으로 합병과 분할 같은 회사의 중요 결정의 경우에만 상장사 일반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대안을 자본시장법을 통해 마련한 상황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의 경우 이사들에게 배임죄를 적용하지 않고 주로 민사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규제한다”며 “형사처벌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킨다는 우려 때문인데 우리나라도 배임죄 적용 범위를 조정하고 민사 책임 중심으로 전환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배임죄 적용을 까다롭게 하거나 폐지하는 대신 주주대표소송 요건을 낮춘다면 형사적 처벌 위험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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