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글로벌 경제 질서의 대격변이 시작됐다. 동맹에도 가차 없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선전포고로 전 세계에 무역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다. 또 힘을 앞세워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는 각자도생의 생존 논리가 세계경제를 집어삼키고 있다.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은 2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대전환과 초불확실성의 시대”라며 “상품 수출 위주에서 서비스 수출과 투자·인력·기술 교류 등 다면적인 대외 경제 전략을 재정립할 때”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대미 투자와 산업·기술협력 면에서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 원장은 “향후 세계 질서는 이분법적 냉전 구도보다는 다양한 국가와 세력 간 복합적 합종연횡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우리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일본·대만·독일이나 글로벌 공급망의 가교 역할을 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글로벌 경제·통상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통상 질서의 불확실성이 보호무역주의 확산, 공급망 교란, 지역 분쟁 등으로 매우 커졌다. 상호 신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과거의 무역 질서를 회복하기도 어렵게 됐다. 앞으로의 경제·통상 질서는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미중 양강의 패권 전쟁을 중심으로 진전될 것이다. 중국의 성장 둔화로 미중 간 경제·군사적 격차는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방대한 내수 경제를 활용한 기술 발전과 풍부한 전략자원에 힘입어 중국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지속되고 양강 체제도 오래 갈 것이다. 다만 과거 냉전 시대와 같은 이분법적 체제가 형성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다양한 국가와 세력 간 경쟁과 갈등, 협력 속에 복합적인 합종연횡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도다. 2050년 무렵에는 인도가 국내총생산(GDP) 및 인구 규모에서 중국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인도네시아·브라질·멕시코 등도 세계 7위권 이내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지경학적인 다극화가 진전될 것으로 전망한다.
-달라진 글로벌 여건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출산·고령화와 전반적인 경제 성숙화로 내수 둔화는 중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 결국 앞으로도 대외 부문이 우리 경제의 성패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다만 디지털 전환과 글로벌 패권 경쟁 등 대내외 여건 변화를 고려하면 상품 수출 위주의 기존 전략만으로 성장 모멘텀을 이어가기는 힘들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에 따른 생산기지 이전 압력도 상품 수출을 둔화시키는 요인이다. 이런 여건에서는 상품 수출뿐 아니라 서비스 수출, 해외·외국인 직접투자, 인력 이동, 기술 교류 등 다면적인 대외 경제 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 빠르게 고령화하는 소규모 개방 경제의 특성을 고려해 해외 전문 인력 확보와 균형 잡힌 경상수지 안정화에 방점을 두는 정책을 수립해 실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지 1개월가량 지났는데 트럼프 2기는 1기 때와 좀 다른 것 같다.
△지난 한 달 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행보는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보호무역주의, 포괄적 감세, 규제 완화, 에너지 독립성 강화, 불법 이민 근절이다. 기본 철학은 집권 1기 때와 유사한데 예전에 비해 정책 추진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한 달간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만 73개에 달했고 선언·각서 등을 포함한 행정 조치는 200개를 훌쩍 넘는다. 특히 통상정책은 매우 빠르게 파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집권 1기 때는 중국에 대한 무역법 301조 관세 부과가 1년 6개월 만에 시행됐지만 이번에는 2주 만에 대중국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관세 조치의 대상과 범위는 매우 넓어졌다. 1기 때는 중국을 제외하면 철강·알루미늄 등 특정 상품을 겨냥한 조치였으나 지금은 보편관세나 상호관세 등 매우 광범위한 관세장벽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는 중국의 불공정 관행을 견제해 미국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면 이번에는 국내 대규모 감세를 위한 재정 수입원으로 대외 관세를 활용하려는 목적까지 더해졌다. 국내 정치와 연계된 이슈인 만큼 관세를 단순히 협상 전략으로 활용하는 선을 넘어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갈 우려가 커진 상황이다. 관건은 미국의 물가 동향이다. 관세 여파로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 국민 불만이 커진다면 내년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관세정책의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통상정책의 지속성 여부는 미국 거시 변수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 정부를 상대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은 무역적자가 큰 나라부터 공략하고 있다. 한국이 당장 타깃이 되지는 안겠지만 미국이 중시하는 자동차 산업은 관세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다만 미국의 관세정책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주요 교역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상대적 경쟁 관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고 자동차 관세가 현대·도요타보다 포드·GM에 더 큰 타격을 입힐 가능성도 있다. 당분간 인내하면서 제품 혁신 및 생산성 향상에 노력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실제 관세 위협이 가해질 경우에도 대미 의존도가 높은 우리가 중국이나 유럽처럼 자동적인 보복 조치를 발동할 경우 리스크가 크다. 일본처럼 무역 흑자, 대미 투자, 산업·기술협력 등에서 유기적 합의를 도출해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한미가 ‘윈윈’할 수 있는 경제협력 방안을 제시한다면.
△미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려면 반도체·조선·원자력 등 한국을 필요로 하는 분야들이 의외로 많다. 조선업의 경우 미국이 해외에서 건조된 선박 운행을 금지하는 존스법과 반스-톨레프슨법을 개정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원자력 분야 역시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적재산권 분쟁이 종결된 만큼 한미가 손을 잡고 해외로 진출할 수도 있다. 트럼프 시대는 이들 분야에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다. 지금의 위기를 제대로 활용해 글로벌 순위 상승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중 패권 전쟁이 격화하면 중국에 대한 우리의 전략도 변화해야 할 텐데.
△미중 갈등을 떠나서 일단 중국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공급한 중간재를 중국이 값싼 노동력으로 가공해 해외로 수출하는 구조로 한중 경제 관계를 인식하지만 양국 관계는 이미 구조적으로 달라져 있다. 반도체를 제외하면 우리는 2022년부터 대중 무역적자로 돌아섰고 공급망 의존의 형태도 역전됐다. 기술 측면에서도 중국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국과 주변국, 선진국과 개도국이 아닌 글로벌 외교·경제의 두 중심 국가로 인식하고 접근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의 접근법도 달라져야 한다. 미국과는 포괄적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중국과는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두고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전략적 대화를 시작할 때다. 정치외교적인 이분법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중국 의존적인 공급망의 리스크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중국과도 소통을 강화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트럼프 시대에 한미일 공조에 변화가 있겠는가.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 미국과의 공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강한 동맹은 플러스 요인이다. 사실 한미일이 캠프데이비드에서 선언한 3국 안보 협력의 단초는 트럼프 1기에 마련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일 공조를 자신의 레거시로 생각할 수 있는 만큼 한미일 협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
-국제사회와의 보다 광범위한 공조 필요성도 제기된다.
△지난 수년 동안 지정학·지경학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간 협력이 중요시됐다. 하지만 자국 우선주의가 강조되는 여건에서는 가치 동맹 프레임에만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지금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국가 간 공조가 중요해졌다. 가령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로 피해가 예상되는 국가끼리 협력해 자유무역 회복을 위해 한목소리를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과 대만·독일 등과의 소통과 협력이 중요하다. 인도·동남아·중남미 등 글로벌 공급망의 가교 역할을 하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로도 협력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경제적 위상에 걸맞게 국제 사회의 중간자적 역할이나 소(小)다자 체제의 선도적 역할에 적극 나설 때다.
-국제 질서의 급변기에 국정 리더십 공백 상태를 맞은 아쉬움도 크다.
△쉽지 않은 여건이지만 정부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민간기업들의 자체 네트워크를 활용한 통상외교도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국내 정치가 먹고사는 문제까지 제약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정 국정협의회도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생존이 달린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이념이나 정치적 득실에 따른 개입을 배제하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He is…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파리 9대학에서 응용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등을 거쳐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23년부터 휴직하고 KIEP 원장과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KOPEC) 위원장을 맡았다. 한국국제통상학회장 등을 지내고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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