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전 세계 국가를 3개 그룹으로 나눠 인공지능(AI) 개발에 필요한 반도체 수출제한을 시행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제한 없이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국가에 포함된 반면 중국과 러시아 등 적대국은 사실상 수출이 제한된다. 다만 임기 막바지인 바이든 행정부가 AI 반도체 산업에 메가톤급 파장을 일으킬 정책을 내놓는 것은 미국에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우려와 미국의 AI 독주를 강화할 묘안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8일(현지 시간) 소식통들을 인용해 바이든 행정부가 마지막 AI 규제가 될 정책을 준비 중이며 이르면 10일 공식 발표된다고 보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 세계 국가를 3개 등급으로 나눠 AI 칩 수출을 통제할 방침이다. 미국의 핵심 동맹들로 구성된 최상위 ‘1단계 그룹’은 미국산 AI 반도체를 지금처럼 제한 없이 구매할 수 있다.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 동맹과 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네덜란드 등 18개국이 대상이다.
반면 ‘적대국’에 해당하는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이라크·시리아 등 ‘3단계 그룹’은 미국산 반도체 수입이 원천 차단된다. 그간 바이든 행정부는 여러 건의 규제를 통해 엔비디아와 AMD 같은 미국 반도체 기업이 중국과 러시아에 수출하는 반도체를 통제해왔다.
나머지 국가들은 ‘2단계 그룹’으로 분류돼 AI 반도체를 수입할 수 있는 총연산력에 상한선이 설정된다. 베트남·인도·싱가포르·멕시코 등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해당된다. 다만 이들 국가에 본사를 둔 기업은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보안 요건과 인권 기준을 충족하면 더 많은 양의 반도체를 수입할 수 있다. 미국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에는 AI 혜택을 허용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소식통들은 “미국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 데이터센터로 흘러가는 AI 칩을 억제하기를 원한다”며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에 AI 개발을 집중시키고 전 세계 기업이 미국식 (AI 산업) 기준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최첨단 AI 칩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하는 동남아시아 및 중동 국가를 경유해 중국·러시아로 흘러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2단계 그룹으로 흘러가는 AI 칩 총량을 제한하면 이들 나라를 경유해 중국 등으로 향하는 AI 칩 규모가 줄어들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아울러 중국과 러시아가 브릭스(BRICS) 등 경제 공동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에서 미국에 줄을 서게 하려는 포석도 담겨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AI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가장 앞서 있는 미국산 AI 칩을 무기로 미국 쪽에 서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구상대로 정책이 성공하면 미국이 중국 등을 따돌리며 AI 분야에서 앞서 나가고 세계 산업계가 미국식 표준을 따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지적 또한 제기된다. AI 칩 수출 상한선 적용을 받는 나라들이 반발하며 화웨이·바이두·알리바바 등 중국 기업에 의존하면 외려 중국의 기술 굴기에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다.
실제로 이번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 엔비디아는 강력 반발했다. 엔비디아는 블룸버그에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수출통제는 미국 정책의 중대한 전환”이라며 “AI 오용 위험을 줄이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성장과 리더십을 위협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소속된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역시 “이 정도 규모와 중요성을 지닌 정책 변화는 대통령 교체 기간과 업계의 의견 제안 없이 서둘러 도입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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