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지만 한국인 중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본 이들은 많지 않다. 미디어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인 그의 작품은 다른 예술가처럼 사진이나 그림으로 만나보기 어렵다. 공공전시기관이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상영해야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작품의 크기가 거대한 데다 몇몇 작품은 기기의 수명이 다해 전시가 이뤄지는 데는 많은 연구와 비용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국내 화랑가에서 소홀히 대접받는 경우가 많았다.
작고한 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2010),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미술관(2012),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2019) 등에서 그를 회고하는 회고전이 열렸지만 국내에서는 작가 생전인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그를 제대로 조명하는 공공미술관 전시가 거의 없었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조망하며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달 30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백남준, 백남준, 그리고 백남준’은 꽤 오랜 시간 회자될 만한 전시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백남준아트센터의 소장품과 자료 141점과 국립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독일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등에서 대여한 작품 등을 포함해 총 160여 점의 백남준 작품과 사진, 영상, 아카이브 등을 대여해 내년 3월 16일까지 백남준 회고전을 연다. 부산현대미술관은 백남준 작품을 거의 소장하지 않고 있지만 백남준아트센터가 처음으로 소장품을 대량으로 외부로 반출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내 미술관 최대 규모의 백남준 전시를 열었다.
전시의 시작은 1961년 시작한 퍼포먼스 비디오 ‘손과 얼굴’. 이 작품은 청년 백남준이 자신을 예술 작품의 매체로 다루며 예술적 자아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양동이 주변에서 소변을 보며 국가를 부르는 퍼포먼스인 ‘플럭서스 챔피온 콘테스트’는 사회와 예술의 권위에 도전하는 백남준식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1층과 2층이 연결되는 공간에 설치된 ‘케이지의 숲-숲의 계시’는 관람객에게 아늑한 쉼터를 제공한다. 8미터 높이의 나무숲에 모니터가 매달려 있는 형태로 이뤄진 작품은 백남준이 예술적 스승인 존 케이지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형 걸리버 로봇과 주위를 둘러싼 18개의 소인국 로봇으로 이뤄진 ‘걸리버’는 관람객이 작품을 두루 감상할 수 있도록 눕혀져 전시돼 있다. 전시 기획자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이 마지막으로 전시한 레이저 작품 ‘삼원소’와 108개의 TV 모니터를 설치한 ‘108번뇌’는 이번 전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TV를 통해 보여주는 영상 매체에서 레이저를 통한 매체로 전환을 시도했다. 삼원소는 백남준의 이런 실험 정신이 드러난 대형 설치물이다. 미술관은 암흑 속에 삼색의 레이저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관람객이 작가의 도전 정신과 어우러질 수 있도록 했다.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를 위해 작가가 제작한 ‘108번뇌’는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와 같은 친숙한 영상 등 짧게 분절된 여러 개의 비디오를 통해 한국의 역사적 격변부터 백남준 개인의 깊은 번뇌를 보여준다. 백남준의 작품의 일부이기도 한 모니터 중 일부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도 해, 고장이 났을 경우 수리가 불가능하다. 백남준은 생전 ‘새로운 기술이 필요할 경우 작품을 상영하는 기기를 바꿔도 좋다’고 말한 바 있다. 전시 기획 측은 이번 전시에서 ‘108번뇌’의 모니터 일부를 재정비해 전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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