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를 소환했다. “핵을 많이 가진 상대와 잘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발언은 많은 이에게 2018~2019년 펼쳐진 트럼프·김정은 브로맨스를 떠올리게 했다.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타고난 각하와 직접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기를 희망한다(김정은의 2018년 9월 21일자 친서)”와 같은 김정은의 구애가 재개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시된다. 과연 그럴까.
우선 트럼프가 김정은을 당장 만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번 대선 유세 기간 트럼프가 김정은에 대해 한 말 중 만나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2016년 5월 트럼프가 “김정은과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면서 더 나은 핵 협상을 할 것”이라고 한 것과 대비된다. 트럼프의 협상술은 상대방을 구슬리는 것이 아닌 겁박을 통한 주도권 확보다. 2017년 한 해 동안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을 펴면서 미국이 개전할 때나 동원하는 항공모함 3전단을 동해로 보내 김정은을 위협했다. 그 결과 김정은은 그해 11월 29일 서둘러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대화장으로 나왔다. 당시와 같이 돈이 많이 드는 압박을 트럼프가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전화해서 친절하게 김정은과 만남을 청할 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걸림돌이다. 북한군 파병으로 전쟁에 동참한 김정은과 바로 만나겠다고 트럼프가 나선다면 미국 내 여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24시간 내에 러·우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공약한 트럼프는 우선 러시아를 압박해 북한군 파병을 중단시키고 협상을 추진할 것이다. 특히 누구보다도 공명심이 강한 트럼프는 2기의 대외정책 ‘유산 쌓기’ 일환으로 러·우전쟁 종식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타려 할 것이다. 김정은과의 만남은 뒤로 미뤄질 수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만나려 할 것인가. 2019년 2월 트럼프가 회담을 결렬시킨 ‘하노이의 굴욕’을 김정은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해 연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 5차 전원회의에서 선포한 ‘정면돌파전’이 이를 방증한다.
트럼프와의 협상 2년을 복기한 김정은은 결국 자신들의 핵능력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패착으로 판단하고 자력갱생으로 버티면서 핵능력을 고도화하는 장기전을 선포했다. 이달 현재 미국 본토 공격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핵으로 한국은 타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이 이번에 트럼프를 만날 때는 확실한 전제 조건을 내세울 것이다. 최소치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고 중간치는 핵군축 협상, 최대치는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 인정이다. 트럼프에 아첨하는 김정은의 친서는 사회주의식 기만전술이고 속내는 “초보적인 예의와 외교 규범도 모르고 안하무인격으로 놀아댄 트럼프 패거리들의 날강도적 본성과 파렴치성”에 치를 떤다(충북간첩단 사건, 2019년 3월 12일 평양지령).
이 모든 한계를 넘어 다시금 만남이 성사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이가 보여주기 식 합의 도출을 우려한다. 예를 들어 북한이 2018년 4월과 같이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실험 유예를 선포하고 대신 일부 제재를 해제하는 형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수용하기 어렵다. 적어도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 전반, 예를 들어 대륙간탄도미사일 파기,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개발 제한 등이 이뤄져야 트럼프의 거래주의적 성격에 부합된다. 북한도 한국을 타격할 능력만 남겨두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 북한을 보복할 미국의 능력을 제한할 수 없다면 북한 핵능력의 효용성도 반토막 나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북한이 한국을 향해 핵을 사용할 경우 미국의 대규모 응징 보복에 온전히 노출될 수 있다. 결국 미북 간 협상은 공전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트럼프의 미국에 한 가지만 확실히 하면 된다. 북한이 한국을 향해 핵으로 공격할 경우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 정권을 끝낸다는 약속을 지금과 같은 확장억제 제도화를 통해 보장 받는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이를 흔든다면 한국은 모든 선택지를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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