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역사와 폭넓은 인기의 스포츠 카드가 국내 골프 시장에도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이나, 황유민, 방신실 등 인기 선수들의 카드를 모아 소장하거나 거래하는 새로운 풍경을 조만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는 올해 7월부터 ‘2024 에픽 KLPGA 포토 카드’를 판매하고 있다. 올해 홍보모델 12명의 사진으로 제작한 것. 퓨어(PURE)와 여신(GODDESS) 두 가지 테마로 각 팩에 12장의 포토 카드를 넣은 한정판 제품이다.
앞면에는 사진, 뒷면에는 이름 등 간단한 정보가 적힌 형태인데 반응이 좋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퓨어’한 사복 버전과 드레스 차림으로 여신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버전이 선수들의 대회장 밖 모습을 궁금해 하던 팬들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포토 카드는 국내 골프 시장에 처음 도입된 스포츠 카드라는 점에서 소장 가치가 있다. KLPGA는 나아가 선수 200명의 사진과 친필 사인 등이 담긴 트레이딩 카드를 조만간 출시할 예정이다. 스포츠 카드 거래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판이 깔리는 것이다.
‘골프’에서 ‘골프 카드’로…새 도전 나선 레베카 김
KLPGA와 공식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카드를 만드는 곳은 트레이딩 카드 전문기업 하비코리아다. 파나틱스&탑스, 어퍼덱, 파니니아메리카 등 미국 수집품 시장 유수 업체의 한국 내 총판을 독점으로 맡은 곳이다.
최근 서울 서초구의 하비코리아를 찾아 가봤다. 우리를 맞아준 이는 하비코리아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레베카 김. 오래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팬이라면 반가운 이름일 수도 있겠다. 2005년 서울경제신문에 ‘김송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17세였던 재미동포 2세 레베카는 스폰서 초청 티켓 1장을 놓고 25명이 겨룬 18홀 토너먼트에서 우승해 세이프웨이 클래식에 참가했다. 생애 첫 LPGA 투어 대회 출전이었다. 그때 이미 180㎝의 큰 키를 갖춰 미셸 위(위성미)를 연상케 하는 교포 선수로도 주목 받았다. 2011년쯤까지 LPGA 2부(시메트라) 투어를 주로 뛰었고 2009년 US 여자오픈에도 참가했다.
시카고에서 시메트라 투어 대회를 마치자마자 US 여자오픈 예선전을 치르러 캘리포니아까지 차로 달려 샤워만 하고 바로 대회에 나갔던 기억, 연장 또 연장 끝에 아깝게 3등으로 2명에게 주는 본선 진출권을 놓쳤다가 ‘대타’로 뽑혀 꿈의 무대를 밟았던 2009년의 기억까지 레베카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렸다. 현역 때는 허미정, 최운정, 장하나와 친하게 지냈다고.
듀크대에서 심리학을 배우며 여자골프팀에서 4년 전액 장학생으로 활약했던 레베카는 은퇴 후 한국에 들어와 영어학원 강사로 일했고 테크 분야 스타트업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기도 했다. 코로나19 시기에 공부를 다시 해 2022년 애리조나주립대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도 받았다.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하비코리아에서는 1년 넘게 근무 중이라고. 미국에서 나고 자라 스포츠 카드 문화에 익숙한 레베카에게 하비코리아는 “재밌는 일을 하는 재밌는 회사”다. 특히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회사의 인식에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골프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과 짜릿함을 사회생활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고. “불가능해 보이는 샷을 성공했을 때, 마지막 18번 홀에서 역전을 해냈을 때 정말 짜릿했죠. 지금은 동료들과 같이 시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이란 게 있어요.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도 좋고 다양한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죠.” 업무상 라운드할 일도 종종 있는데 선수 출신이란 사실은 공이 잘 맞을 때만 밝힌다고 한다.
“5년 내 1000억 시장 성장 가능”
잘 알려졌듯 미국에서 스포츠 카드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레베카는 “현재는 주로 이베이를 통해 거래되는데 마이클 조던의 점프맨 로고가 들어가 있는 카드는 호가가 수십억 원”이라고 소개했다. 스타 플레이어의 신인 시절 모습을 담은 루키 카드도 종목을 불문하고 인기가 높다고.
“트레이딩 카드는 선수 스스로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경기에서 잘하면 그만큼 가치가 올라가고 부상을 당하면 가치가 떨어지거든요. 인기를 측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카드 제작 때 해당 선수의 사인을 넣는 대신 그에 대한 비용을 선수한테 지불하는데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 오타니 쇼헤이 같은 경우는 사인 하나당 5달러를 지불한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스포츠 카드 시장은 어느 정도로 형성이 돼있을까. 레베카는 “지금이 300억 원 시장이라면 5년 안에 1000억 원 시장으로 성장할 걸로 보고 있다”고 했다. 하비코리아는 2011년 국내에서 사업을 시작해 코로나19 시기에는 연평균 50%의 매출 증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종목별로는 야구가 단연 1등이었는데 2020년부터 축구가 1위를 뺏었고 농구, 미국프로풋볼(NFL), 북미아이스하키(NHL), 포뮬러원 자동차경주(F1) 순으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레베카는 KLPGA 선수들을 앞세운 골프가 스포츠 카드 시장에서 최고 인기 종목으로 치고 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 중 하나인데 스포츠 카드가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는 그는 “1차로 내놓은 포토 카드부터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다. KLPGA 투어의 팬 베이스가 상당하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고 했다. “대회장 가면 팬들이 선수한테 사인을 받을 곳이 생각보다 마땅치 않거든요. 잘못하면 스폰서와 계약에 걸리는 부분도 있고 해서. 그런데 카드는 일단 본인 사진이라 해주는 선수도 기분 좋고 사인을 받기에도 편하고 알맞아요. 대회장에서 포토 카드에 사인 받는 분들이 꽤 많더라고요.”
사인모자·패치와 결합, 무한확장 가능성도
곧 출시될 카드는 좋아하는 선수를 직접 고르는 대신 그 선수가 속한 그룹만 선택할 수 있는 ‘랜덤팩’으로 구성해 재미를 더할 예정이다. 리테일·하비·프리미엄 식으로 가격대별 티어(tier)를 나눠 판매하는 한편 향후에는 선수의 사인이 들어간 모자와 장갑, 경기복에 붙였던 패치 등을 카드와 함께 내놓는 등 다양한 상품을 계획하고 있다.
1988년생인 레베카는 “저는 ‘찐’ 세리키드다. 그런데 박세리 선배님을 기념하는 카드는 드물다. 레전드가 된 (박)인비 카드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꼭 박세리·박인비 카드를 출시하고 싶다”며 “개인적으로 주니어 시절의 경험이 굉장히 소중한데 미국에서 어릴 적부터 경험한 골프 문화를 한국의 꿈나무들에게 알려주고 서포트하는 쪽으로 꿈을 갖고 있다”고도 했다.
“어릴 적 경험이 제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주니어들에게 피지컬이나 치료, 트레이닝, 언어적인 부분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늘 생각하고 계획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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