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에 산 지 40년이 넘었는데 보상이 언제 완료될지 모르겠네요. 잠실은 계속 발전하는데 여긴 갈수록 적막해지니 토성 보존을 싫어하는 주민들이 많을 수밖에 없죠.”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한 주민이 최근 기자에게 한 말이다. 사적 11호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은 1997년 백제시대 유물이 출토된 이후 개발의 시계가 멈추다시피 한 곳이다. 유적이 깔려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택과 땅을 매입해 주민을 이주시키는 방식의 보존 정책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개발 제한 전에 세워진 아파트들의 재건축 연한이 곧 도래해 정비 논의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한때 백제 위례성의 토성이었을 둔덕으로 둘러싸인 동네를 걷다 보면 주민의 말을 실감하고도 남는다. 한 집 건너 한 집꼴로 나오는 매입 완료 주택들은 빈집으로 남아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철거가 완료된 필지들은 공터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1990년대 시작한 매입은 아직도 62.2%(보상 대상 1537필지 중 956필지 보상)만 끝난 상태라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다. 반면 토성 산책로에 서면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잠실의 스카이라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풍납동이 침체되는 사이 옆 동네 잠실은 아파트 재건축이 속속 이뤄지며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보존과 개발 중 무엇이 먼저냐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이다. 땅을 파기만 하면 유적이 나온다는 풍납동에서 개발만 외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다만 도외시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이다. 독일 드레스덴의 엘베 계곡은 다리 건설 때문에 2009년 세계유산 지위를 빼앗긴 불명예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역 당국이 불명예를 무릅쓴 배경에는 주민들의 꾸준한 기반시설 확충 요구가 있었다. 주민의 삶을 위해서는 세계유산 보존에도 금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반가운 것은 한국에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국가유산청 위원회는 풍납토성 내에 있는 풍납미성아파트의 재건축 허가 신청에 대해 비교적 유연하게 심의에 임해 23층 재건축을 허락했다. 앞으로도 주민의 재산권과 문화유산 보존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결과물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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