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올해 입학한 고등학교 정문에 얼마 전까지 2024학년도 대학 입시 결과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스카이(SKY)’ 합격자 수와 함께 ‘의·치·한·약대’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도 적혀 있어 눈길이 갔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들의 ‘입결’에 의대 진학 결과가 별도 항목이 된 모양이다. 학부모와 교사·수험생들에게 의료 계열 단과대학을 일컫는 ‘의치한약수’는 이미 익숙한 용어가 됐다.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면서 대학 합격 커트라인도 과거와 사뭇 달라졌다고 한다. 지방 의대 커트라인이 서울대 이공 계열 최상위 학과보다 높다는 얘기도 들린다. 어느 나라에서나 의사는 선망받는 직업이지만 우리는 정도가 심하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의대 입시반이 운영되고 있다고 하니 의대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성적이 우수하고 머리가 똑똑한 학생들이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들이 훌륭한 의사가 돼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높아지고 국민 보건이 증진된다면 국가적으로 좋은 일이다. 문제는 의대 쏠림 현상으로 인적 자원 배분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국가 경쟁력이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수 인재들이 의학 계열뿐 아니라 공학·자연 계열로도 골고루 진학해 첨단 기술을 개발할 과학기술인으로 길러져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가뜩이나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입시 먹이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불리는 의대 정원이 늘어나면 이공계 기피 현상이 더욱 심각해질 것은 불문가지다. 2025학년도 입시에서 의대 정원이 1540명 늘어난다. 서울대 이공계 입학 정원(1775명)에 육박한다. 올해 서울대 공대 입학생 100명 이상이 개학하자마자 휴학했다고 한다. 사유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과학기술 인재들이 가장 선호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도 자퇴하거나 휴학한 후 복학하지 않는 중도 이탈 학생이 최근 5년간 576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 역시 상당수는 반수 등을 통해 의대에 진학했을 것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국회는 2004년 이공계 지원 법안인 ‘국가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이공계 지원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공계 인력의 처우를 개선하고 과학기술 분야의 탁월한 업적이 있는 핵심 이공계 인력에게는 재직 중에 연구 장려금을 지급하고 퇴직 후에는 생활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평생 지원 체제를 마련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일로다. SKY 이공계 자퇴생은 2020년 723명에서 2021년 973명, 2022년 1302명으로 늘었다. 서울대 공대·자연대 대학원은 지난해 입학 정원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역대 정부마다 이공계 활성화 대책을 꾸준히 내놓았는데도 이같은 상황이라면 ‘백약이 무효’라는 생각마저 든다.
의대 정원 증원을 추진 중인 윤석열 정부도 3월 이공계 활성화 대책 태스크포스(TF)를 꾸려 회의와 간담회를 이어가고 있다. TF를 통해 다양한 정책·과제를 발굴해 이공계 인재가 걱정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목표다. 단기적으로는 우수 인재들이 이공계를 선택하도록 유인책을 제공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적절한 지위와 처우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 대책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충분조건은 과학기술인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연구개발(R&D)이나 창업을 통해 성과를 내거나 성공하면 의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들이 다니는 학교 정문에 게시됐던 현수막에는 KAIST와 포스텍 등 과학기술특성화대학 합격자 수도 포함돼 있었다. 10명이었다. 이들이 휴학하거나 자퇴하지 않고 ‘대체 불가 기술’을 개발하는 고급 인재로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고 과학기술인은 나라를 먹여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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