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이 치러진 지 한 달 넘게 지났지만 참패한 국민의힘은 여전히 ‘친윤(親尹·친윤석열)’의 틀 속에 갇혀 있다. 또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은 ‘친명(親明·친이재명)’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와 정당 간의 왜곡된 ‘지배-맹종’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국민의힘도 민주당도 가망이 없다”고 지적했다. 여당 혁신과 관련해 서 교수는 “정책도 이념도 전략도 없이 정치적 이익만 좇는 ‘패거리 계파’ 대신 정책 대안을 준비·홍보하고 국회 내 표결 집단으로 움직이는 ‘정책 계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미국 공화당의 정책 계파가 선보인 ‘미국의 계약’처럼 ‘한국의 계약’을 내놓아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고성·막말 자제, 상시 국회, 정책 청문회 활성화 등을 약속한다면 극단적 대립 정치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정치 전문가로 통하는 서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올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제기될 수 있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올려주더라도 기존의 방위비 분담금 관련 지출 구조나 감독 기능을 쇄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4·10 총선 뒤 여당 안팎에서 윤석열 대통령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물론 윤 대통령 탓을 할 수 있지만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실수할 때 국민의힘은 무엇을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검토가 더 중요하다. 대통령의 잘못된 시그널이 있으면 이를 나름대로 제어하려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텐데 국민의힘은 그러지 못했다. 결국 대통령과 정당 간의 평소 관계가 선거 기간에 여실히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 제도가 지속되는 한 국민의힘뿐 아니라 한국의 어떤 정당도 가망이 없다. 정당의 내부 역량을 키워야 한다. 다음 총선인 2028년에는 윤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지 않은가. 이제라도 다음 총선에서는 어떻게 수도권 젊은 층 등 떠나간 민심을 되돌릴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윤 대통령의 취임 2주년 기자회견을 어떻게 봤는가.
△원래 대통령 기자회견은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 쉽지 않다. 다만 이번 기자회견의 방식에는 아쉬움이 있다. 대통령이 직접 기자를 지명하고 부족한 답변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질문을 할 수 있도록 했다면 더 진솔하고 의미 있는 회견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소통을 활발히 하기로 한 것은 평가할 만하며 이번 회견을 계기로 국민 소통에 적극적인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
-총선 이후 민주당이 강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역풍은 없을까.
△민주당 171석, 범야권 192석을 앞세운 특검 공세 등은 여론의 향배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재명 대표에게 힘이 실리게 되면서 나타나는 당내 민주화의 퇴행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야당인 한 그 역풍의 크기나 성격은 결국 윤 대통령과 여당에 달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윤 대통령이 국민들이 찬성하는 특검 문제 등에서 확실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국민의힘이 정당 민주주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면 민주당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찾아가 함께 눈물을 흘린다면 양극화가 심한 정치 환경에서라도 중도층 유권자들의 마음이 조금은 움직이지 않겠는가.
-국민의힘의 총선 참패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다양한 차원의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유권자 차원, 특히 40대와 50대 초반의 상대적 박탈감과 기득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지지 성향이 야당 쪽으로 많이 기운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금 한국의 40대나 50대 초반은 한국 경제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대인데 현재 우리 사회가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기득권 구조에 대한 불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가장 무서운 게 상대적 박탈감이다. 기득권 세력이란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해 대출을 받아가며 일하는 자신들과 달리 부모를 잘 만나서 훨씬 좋은 지위를 누리면서 자기 이익만 취하는 세력일 텐데 이들은 주로 보수정당 세력을 기득권 세력이라고 보는 것 같다.
-국민의힘은 이제 뭘 해야 하는가.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만 맹종하는 ‘친○○’ 계파가 아닌 정당 내 정책 계파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지금도 국회 안에는 의원들끼리 모여 세미나도 하고 외부 전문가들을 불러 얘기도 듣는 공부 모임은 많지만 정책 계파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정책 계파의 핵심은 정책 대안을 준비·홍보하고 국회 내 표결 집단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정당 내 개인은 공천권을 가진 지도부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개인 차원이 아니라 계파 차원에서 제기한다면 다른 게임이 될 수도 있다. 정기 모임을 가지고 치열한 내부 논쟁을 보장하는 정책 계파로 움직인다면 결국 정당 지도부가 이 집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책 정당으로의 긍정적인 변화도 가능해질 수 있다. 정당 내부의 정책 계파이지만 결국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하는 정치인 셈이다.
-친윤계·친명계는 어떤 계파라고 생각하는가.
△정책 계파가 아니라 그냥 하나의 집단이다. 대통령 혹은 대선 후보만 쫓아다니고 맹종하는 친윤·친명 집단은 패거리 계파로, 정책도 이념도 전략도 없다. 오로지 대통령과 대선 주자의 눈치만 보고 대통령을 지키거나 차기 대통령을 만들려는 욕심만 있는 집단이다. 인물 차원의 양극화가 심한 한국 정치에서 이들은 극단 정치를 더 부추기는 역할만 한다. 그래서 계파라는 말이 붙으면 으레 청산 얘기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제 패거리 계파는 청산하고 정책 계파를 키워야 한다.
-우리 정치에서 패거리 계파 청산과 정책 계파의 발전이 가능한가.
△물론 대통령제를 유지하는 한 패거리 계파의 완전한 해소는 어렵다.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를 쫓아다니면 장관을 하든 기관장을 하든 한자리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볼 때 패거리 계파의 등장을 원천적으로 막기는 어렵다. 어찌 보면 계파 등장은 거의 필연적이다. 하지만 정책 계파가 생겨서 정당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정당 내 기득권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에 대해 국민들이 호감을 갖게 된다면 정책 계파의 비중이 더 커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패거리 계파의 설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정책 계파는 국민들이 진정 바라는 것을 현장에서 파악해 선거 전략과 홍보 전략을 짜는 집단이기 때문에 정치적 관심이 높은 우리 국민들에게 분명히 환영받을 것 같다.
-정책 계파의 성공적인 모델을 소개한다면.
△미국 공화당의 뉴트 깅그리치 의원이 1978년에 결성한 ‘보수적 기회의 사회(Conservative Opportunity Society)’라는 정책 계파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냉전 시기의 반공주의 정서에다 기독교 세력과 재정 건전성 수호 세력을 더했다. 남부 출신의 젊은 보수파 의원들을 모아 새로운 정당 노선을 모색한 것이다. ‘미국의 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세금 인하, 균형 예산, 의원 다선 제한 등의 정치 개혁 아이디어들을 내건 이들은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승리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국민의힘이 ‘한국의 계약’을 만든다면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할까.
△규범과 제도, 정책 차원 등 다양해야 한다. 먼저 국회 내에서 고성과 막말 등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위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규범적 선언을 해야 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에 입장할 때는 무조건 기립해 박수로 맞이하겠다는 약속도 하면 좋겠다. 제도 개혁 차원에서는 상시 국회를 통해 일을 많이 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한다. 인사 청문회도 중요하지만 정책 청문회 활성화가 특히 중요하다. 예컨대 의료 개혁이나 의대 증원 같은 난제들에 대해 국회가 이견 및 갈등 조정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 무기명투표를 줄이고 기명투표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은 의원들이 기명투표를 했다가 잡혀가는 군사 독재 시대가 아니지 않나. 유권자들의 알 권리와 선거 평가의 기준을 위해서라도 소신껏 기명투표를 하고 지역구에서 평가받도록 해야 한다.
-올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트럼프 대선 후보 측이 주한미군 철수 및 축소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결국 분담금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동아시아 안보 균형을 전략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미국의 현실적 이익 및 자신의 업적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트럼프는 양극화 시대에 미국의 오래된 인종 문제와 글로벌 리더십에 대한 거부감이 낳은 정치인이다. 그가 재집권한다면 정책 방향성은 명확해 보인다. 다른 나라 안보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방위비 분담금을 많이 내게 하고, 미국에 생산 시설을 많이 짓게 하고, 무역 수지를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는 방위비 협상에서 어느 정도 올려주더라도 이번 기회에 기존의 방위비 분담금 관련 지출 구조나 감독 기능을 쇄신하면 좋겠다. ‘미국 우선주의’라는 새로운 기조는 미국 전체의 방향이지만 여전히 트럼프의 미국과 바이든의 미국은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불확실성 요소를 관리해가야 할 것이다.
◆He is…
197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상문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에서 미국 의회와 외교정책을 전공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윌밍턴)에서 정치학과 조교수를 거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풀브라이트 펠로를 거쳤고 미국정치연구회 회장과 한국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