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鼎)’은 다리가 3개 달린 솥을 일컫는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가면 볼 수 있다. 무쇠로 만들어져 육중한 몸체를 3개의 다리가 든든하게 지지한다. 솥다리가 2개면 넘어지기 쉽고 4개면 안정적이지만 한 쪽이 쳐들리면 뒤뚱거리면서 흔들린다. 3개의 경우 하나라도 부서지면 무너지지만 대체적으로 균형을 잘 유지한다. 카메라를 세우는 트라이포트(삼각대)의 다리가 3개인 이유다.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했던 삼국시대는 서로 팽팽하게 긴장하고 경쟁하면서 국력을 키우고 각자의 고유한 문화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킨 시기로 평가된다. 때때로 한 나라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다른 두 나라가 동맹을 맺어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뤘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완전 경쟁 체제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독과점으로 운영되는 시장이 늘 존재한다. 대체로 국가나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기간산업이 그렇다. 금융과 통신 시장이 대표적이다. 국내 이동통신 시장도 오랫동안 과점 체제로 운영돼왔다. SK텔레콤과 KT·LG유플러스가 정립해 20년 넘게 시장을 삼분하고 있다. 현재 이통 3사의 시장점유율은 SK텔레콤 40%, KT와 LG유플러스가 각각 20% 정도다. 알뜰폰 시장이 커지면서 점유율이 줄었으나 매출 상위 알뜰폰 업체가 이통사들의 자회사인 점을 감안하면 이통 3사의 통신 시장 지배력이 여전히 절대적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중국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제4 이통사인 라쿠텐이 뒤늦게 진입해 7~8%의 점유율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NTT와 KDDI·소프트뱅크의 점유율(알뜰폰 자회사 포함)은 여전히 80%가 넘는다. 한정된 주파수 자원을 사용하는 통신 산업의 특성 때문이다.
대체로 과점 체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영되지만 제품·서비스 공급자가 소수이다 보니 담합이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국내 이통 3사도 과거 담합을 이유로 종종 경쟁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았다. 지금도 판매 장려금 담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통사들은 방송통신위원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판매 장려금을 지급했을 뿐 담합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공정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백억 원의 과징금을 이통 3사에 부과할 태세다. 가계 통신비 부담 완화를 추진하는 정부 정책에 호응하기 위해 이익 감소를 감수하면서 중간 요금제를 신설하고 저가 5세대(5G) 요금제까지 출시했지만 담합 의혹으로 과징금까지 물 처지에 놓인 이통사들의 사정이 딱하다.
현 정부 들어 이통 3사를 둘러싼 경영 환경은 ‘사면초가’다. 5G 수익 구간을 지나면서 각자 연간 1조 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지만 5G 가입자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고 인구 감소세를 감안하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장담하기 어렵다. 정부가 연일 통신비 인하를 압박하면서 수익성은 악화하고 있다. 통신 소비자들에게 통신비는 ‘소소익선’이다. 더욱이 경쟁 촉진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제4이통사가 곧 출범하고 통신시장의 진입 문턱이 낮아지면서 금융사들의 시장 진출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과 5G처럼 6G도 기술 개발과 표준화를 주도하고 조기 상용화하기 위해 투자도 게을리할 수 없다. 돈 쓸 곳은 많은데 투자 재원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통사들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탈통신’을 내걸고 차세대 먹거리 찾기에 분주하다. 정부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이통사들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올라타기 위해 혁신 경쟁을 시작했다. 대규모언어모델(LLM)과 AI 반도체 개발은 물론 AI 에이전트(비서)와 같은 서비스를 출시하기 위해 글로벌 통신사와 빅테크, 스타트업과 활발하게 합종연횡 중이다. 이통사들이 AI라는 신선한 식재료(기술)를 큰 가마솥(협력)에 넣고 팔팔 끓여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맛과 풍미의 음식(서비스)을 내놓는다면 내수 기업이라는 굴레에서도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통신을 넘어 과감한 인공지능전환(AX)을 통해 과점 체제에서도 기술 혁신과 시장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음을 증명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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