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이 여당 참패와 야당 압승으로 마무리되면서 여야의 표정이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어떤 승부든 끝이 좋으면 그 과정이 다 좋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더불어민주당이 그런 상태다. 형편 없는 상대를 만나서 거둔 승리도 아군의 멤버·팀워크·전술에 대한 훌륭함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위르겐 클린스만 전 축구국가 대표팀 감독이 지난 아시안컵 1·2차전을 힘겹게 승리한 뒤 ‘셀프 칭찬’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결과가 나쁘면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블레임 게임’이 벌어진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중 누가 더 잘못했느냐를 놓고 설전이 오가고 있다. 대통령의 독선과 불통, 선거 전략 부재, 김건희 여사 리스크, 과학기술 예산 삭감, 미흡한 물가 대응을 비롯한 정부 정책의 실패 등 패배의 이유는 한이 없다.
비록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했어도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을 유권자가 모두 심판한 것으로 오독해서는 안 된다. 의료·노동·연금 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의료 개혁 추진은 의료 파행 장기화로 외려 여당 표에 도움이 안 됐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정책 방향 자체에 대한 국민 지지는 높다. 올 2월 한국갤럽이 성인 10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76%가량이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지난해 초 ‘건폭(건설 현장 폭력)과의 전쟁’을 벌일 때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기도 했다. 이밖에도 한미 동맹 격상, 탈원전 정책 폐기, 부동산 임대차 3법의 개정 추진, 기업 규제 개선 등의 정책 방향이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들로부터 부정 당한 게 아니다.
특히 대다수 국민들이 환영했던 정책이 있었다. 바로 증시 밸류업 정책이다. 정부가 한국 증시의 지긋지긋한 고질병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해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해 야심 차게 이를 추진해왔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기업가치 제고를 유인하고 배당 확대,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에 세금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 핵심이다. ‘K밸류업’ 정책 덕에 총선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투자가들이 10조 원 넘는 주식을 사들였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자마자 정책 무산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중동 전쟁 리스크가 덮친 금융시장에 밸류업 무산 우려까지 더해져 한국 증시는 풍전등화와 같다.
“코스피 지수 5000 달성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에 비해 너무 저평가돼 있어서 (이 부분만) 정상화돼도 4500선을 가뿐히 넘을 것입니다.” 밸류업 정책 담당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2021년 대선 후보 시절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400만 개인투자자, 2300만 명의 국민연금 가입자에 영향을 주는 사안인 만큼 거대 야당의 수장은 지금도 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자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밸류업 정책은 단순히 주가 부양 차원을 넘어 기업의 투자금 조달, 가계의 자산 형성, 경영 효율성 제고 등을 통해 경제의 활력을 높이겠다는 것으로 보다 큰 틀의 경제정책이다. 일본이 아베 신조 정부에서 씨를 뿌린 밸류업 정책을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이어받아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추진해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증시 저평가 해소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당에 따라 유불리가 갈리는 사안이 아닌 만큼 야당도 정책 추진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부동산보다는 주식투자를 통한 건전한 자산 형성을 중시하는 민주당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 시장에서는 야당이 ‘부자 감세 프레임’을 걸어 배당 확대 기업에 대한 법인세 완화나 주주들의 배당소득세 감경에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걱정이 많다. 증시 저평가 해소 방안으로 야당은 지배구조 개선을, 여당은 기업 자율과 세제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 방법론 차이가 있더라도 방향에 동의한다면 시장 전문가들과의 소통을 통해 얼마든지 효과적인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대표는 고물가 시대에 13조 원의 ‘민생회복지원금’ 살포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밀어붙이기보다 합의 가능한 합리적 정책부터 우선 추진해야 한다. 여야가 극한 대립 정치에서 벗어나 단 한 건의 정책 협치라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