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도 사람처럼 국적을 갖고 있다. 국제법은 선박이 등록된 나라를 그 배의 국적으로 간주하며 이중국적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선주는 세금과 규제 부담을 덜면서 선원을 저렴하게 고용할 수 있는 나라를 선택하게 된다. 선주가 편의상 선박 국적을 자국이 아닌 외국에 둘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편의치적(便宜置籍)’이라고 한다. 일종의 ‘선박 국적 세탁’이다.
이 제도의 원조 국가는 파나마다. 파나마는 1920년대부터 운하와 낮은 규제를 이점으로 내세워 해외 선박 등록 유치에 적극 나섰다. 미국의 여객선사들이 자국 금주법 적용을 피해 배 안에서 손님들에게 술을 제공하기 위해 많은 배를 파나마에 등록했다. 현재는 글로벌 선사 대부분이 자국이 아닌 외국에 선박을 등록하고 있다. 특히 파나마와 라이베리아·마셜제도·홍콩·싱가포르·중국·몰타·바하마 등 8개국이 편의치적 중심국으로 자리 잡았다. 8개 나라 국적 선박이 2022년 전 세계 해상 선적량의 74%를 차지할 정도다. 토고·피지·탄자니아 등도 선박 국적 세탁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편의치적 제도가 조세 경감과 같은 통상적 사업 목적을 넘어 불법 해상 밀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이 제도를 해상 밀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배에 인공기 대신 파나마·토고·시에라리온·탄자니아·팔라우·피지·중국 등의 국기를 달고 다닌다. 이를 통해 석탄과 광물, 불법 품목 등을 밀수출하면서 석유·사치품을 밀수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근래에는 우리 정부 당국이 토고 국기를 달고 운행하던 3000톤급 화물선 ‘DEYI호’를 대북 제재 위반 혐의로 나포하기도 했다. 외교·정보 당국과 군은 미국·일본·유럽연합(EU) 등과 공조해 북한의 국적 세탁 선박들에 대한 추적·검색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또 토고 등 편의치적 유치국들이 유엔의 대북 제재에 적극 협조하도록 우리가 더 정교하게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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