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 링크는 서울경제신문 홈페이지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앞서 들려드린 멸균팩 이야기(다시 읽기) 기억하십니까? 멸균팩에 '재활용 어려움' 마크를 붙인 환경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커져서인지, 얼마 전엔 종이팩 전용 수거체계를 만든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캔, 유리병, 플라스틱, 종이 수거함에 '종이팩'도 당당히 추가돼서 손쉽게 분리배출 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환경부에서 아직 검토 중이라고는 하지만 느낌이 좋습니다. 14%에 불과한 우리나라의 종이팩 재활용률이 빠르게 개선될 계기가 될 겁니다.
그렇지만 제도 변화와는 별개로, 종이팩을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또 해보려고 합니다. 작년 12월 21일에 숲과나눔(인스타그램만 봐도 엄청나게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에서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정책포럼'을 열었는데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엄청 많았거든요.
종이팩, 재활용 잘 돼야 친환경
특히 배연정 서울대 그린에코공학연구소 기획조정실장님의 발표를 듣고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종이팩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배 실장님은 '종이=친환경'이라는 인식부터 뒤집으셨습니다. 종이팩이 플라스틱보다 여러모로 장점이 있지만 딱 잘라 친환경은 아니라는 겁니다. 종이와 플라스틱을 비교했을 때 에너지 사용량, 공기오염, 수질오염의 측면에서 종이가 더 나쁠 수 있다고 합니다. 종이를 생산하느라 나무를 벌목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산 및 유통, 재활용 과정 전체의 탄소배출량은 플라스틱보다 적다고 합니다.
관건은 종이팩을 얼마나 더 제대로 재활용하느냐, 에 달렸습니다. 재활용이 제대로 잘 되면 명실상부한 친환경 소재라는 이야기입니다.
비용 측면에서도 종이팩이 낫습니다. 종이팩은 저렴(1리터 기준 플라스틱 용기=800원, 종이팩=640원)하고, 네모나서 빈틈없이 쌓기 좋으니까(같은 공간이라면 플라스틱 용기보다 40% 더 많이 실을 수 있음) 물류비가 절약되고, 음료를 오랫동안 보관하기 좋아서(=멸균팩) 기업 입장에서는 매력적입니다. 또 재활용의무 분담금(EPR)도 출고량 1만kg 기준 단일소재 유색 페트병이 209만원인데 비해 일반팩은 65만원, 멸균팩은 79만원으로 저렴합니다. 다만 이러한 낮은 분담금은 제조사들이 굳이 종이팩을 회수·재활용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몰랐던 사실. 멸균팩은 골판지(ex.택배박스)와 같이 섞어서 재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대로 수거만 되면 이미 갖춰진 골판지 재활용 시스템에 투입, 안쪽의 폴리알을 제외한 70%는 재활용 가능하다고. 현재도 이렇게 골판지로 환생하는 멸균팩들이 많은데, 국내 재활용 통계에선 실적으로 안 잡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종이팩 재활용률이 이렇게 낮게 잡힌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멸균팩을 골판지로 재활용하는 것은 ‘다운그레이드’고,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리고 배 실장님은 종이팩의 낮은 재활용률에 대해 '경제성'의 측면에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재활용률은 85%나 되는, 전세계적으로도 정말 잘 하고 있는 나라인데 유독 종이팩만 14% 이유는 "돈이 안 돼서"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가구당 폐지배출량이 월 15kg 정도인데 종이팩은 월 120g(1리터 종이팩 6개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러고보니 에디터도 종이팩을 한살림에 제출(?)하려고 모아두는 중인데 양이 얼마 안 되긴 합니다.
효율성, 경제성만으로 지구를 구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런 적은 양을 모아봐야 돈이 안 되기도 하고, 실제로 종이팩의 가격도 낮습니다. 새 페트병의 가격은 한 병당 20원인데 요걸 재활용하는 페트 플레이크는 새 페트병 가격의 68% 정도. 반면 종이팩은 새 것이 팩당 29원, 재활용 팩은 2.8원(9%). 종이팩을 주워가봐야 돈이 안 된다는 거예요. 1000세대 아파트에서 월 60kg을 배출하면 이게 고작 1만6800원이란 계산입니다.
정부가 종이팩 전용 수거 체계를 만들면 3000톤 이상 회수량이 증가하긴 하는데, 설치 비용도 최소 30억원이나 돼서 효용성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일반팩, 멸균팩을 선별장에서 골라내야 하는데 광학선별기를 도입한 선별장도 많지 않은 실정입니다.
그러나 자원순환을 효용성의 측면에서만 접근해선 안 됩니다. 배 실장님은 종이팩의 재활용률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종이팩 매입 단가를 kg당 750원까지 늘리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폐지를 수거하는 분들이 먼저 수거해가실 정도로 경제성이 개선되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재활용 분담금을 늘려야 할 것이고(비싸니까 제조사에서 더 열심히 회수), 일반팩과 멸균팩이 각각 잘 재활용될 수 있도록 선별해주는 광학선별기도 더 필요하고, 지금 환경부가 검토 중인 대로 종이팩 전용 수거함도 제대로 설치돼야겠죠. 숲과나눔에서도 이런 방향으로 교육, 캠페인, 실제 종이팩 회수까지 열일 중이시라고 합니다.
이날 토론회에선 임기백 매일유업 포장연구팀장님도 발표를 하셨습니다. 기업 입장에서의 현실적인 어려움까지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임 팀장님은 우유뿐만 아니라 콜라, 주류 등 보다 다양한 제품이 종이팩으로 출시되고 종이팩 시장이 커지면 재활용도 더 활발하게 이뤄질 거란 기대도 안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임 팀장님 개인적으로는 멸균팩으로 만든 갈색 휴지를 쓰고 계신다는데, "잘 닦인다"는 한줄 평가에 모두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구를 지키는 열정적인 사람들
그리고 광주광역시에서 먼 길을 오신 천창우 광산구 청소행정과 주무관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광주는 종이팩 회수의 모범 지자체로 꼽힙니다. 공동주택에 총 299개의 종이팩 전용 수거함(사진)+무인회수기를 설치해서 2023년 기준 41톤을 수거했다고 합니다. 인구 40만여명의 도시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양.
특히 아예 종이팩 전용 차량으로 수거, 다른 폐기물과 섞이지 않게 해서 곧바로 제지업체가 재활용하기 쉽게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이 포인트. 이밖에도 진짜 섬세한 행정이다 싶은 포인트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리고 "부산, 경남에서 미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 대흥리사이클링 박혜란 대표님. '밀크웨이' 프로젝트를 통해 카페와 어린이집을 돌며 종이팩을 수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산, 경남 지역 카페 220여곳과 어린이집 1105곳을 매일같이 전기차로 돌면서 수거하고 당연히 보상 시스템도 있고, 겸사겸사 어린이집에서 환경 교육도 하는 열정의 화신 같은 분이십니다.
너무 알찬 이야기가 가득했던 포럼이라 길어졌는데, 자료집은 여기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종이팩 문제에 관심 많으신 분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렇게 체계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각자 조금씩 품이 들더라도 열심히 분리배출하는 것이 중요할 겁니다. 내용물을 전부 소비한 후 팩을 잘라서 펼치고 잘 헹궈준 다음 말려서 주민센터(센터마다 달라서 미리 전화 문의 필요), 아이쿱생협, 한살림, 제로웨이스트샵 등에 전달하면 됩니다. 또 종이팩을 포함해 다양한 재활용 쓰레기를 받아주는 '에코야얼스'랑 '그린고라운드(구 닥터주부)'는 택배 방문수거라 외출이 쉽지 않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참 귀찮은 작업일 겁니다. 하지만 나무가 제 몸을 내어줘서 탄생한 귀중한 자원인 만큼, 꼭 환생시켜서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관련기사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