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리더십’으로 큰 사랑을 받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부터 틈틈이 연구했던 롤모델이 있었다. ‘위대한 소통자(Great Communicator)’로 불리는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다. 쉽고 간결한 언어 구사력과 라디오 진행자·배우로 지내며 체득한 표현력, 유머 감각과 솔직함으로 무장한 레이건 대통령은 연설로 메시지를 전파하고 신뢰를 얻어내는 데 누구보다도 능숙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적마저도 대화와 협상으로 설득해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리더였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여기던 그가 냉전 종식을 이끌어내고 고물가·고금리·실업난으로 침체됐던 미국 경제를 ‘레이거노믹스’로 화려하게 부활시킨 ‘비장의 무기’는 바로 소통과 설득 능력이었다. 공화당 출신의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이 다수를 장악한 하원의 벽을 뚫고 ‘작은 정부’를 위한 예산 삭감과 대규모 감세, 기업 규제 완화를 이뤄내기 위해 틈만 나면 민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협상을 벌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2010년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게 패배한 민주당 출신의 오바마 대통령은 그해 크리스마스 휴가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전기를 읽으며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국정 운영을 어떻게 할지 영감을 얻었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 정권 교체를 이룬 보수 대통령, ‘작은 정부’와 민간 주도 성장, 규제 혁파 등의 시장주의 정책 때문이었을까.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갓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레이건 대통령이 거론되는 일이 잦았다. 파격적인 출근길 도어스테핑은 우리나라에 마침내 ‘소통가’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기대를 고조시켰다.
집권 2년 차가 끝나가는 지금, 기대는 상당 부분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경제 살리기 등을 위해 국정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금쪽 같은 한 해였지만 ‘윤(尹)노믹스’는 엉거주춤하게 멈춰섰다. 올 초 신년사에서 윤 대통령이 강한 추진 의지를 보인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은 소통과 설득 부족으로 동력을 잃은 상태다. 대표적으로 노동 개혁의 첫 단추가 됐어야 할 근로시간제 개편안은 ‘주 최대 69시간 근로’의 프레임에 갇혀 국민 반발만 초래한 채 표류하고 있다.
국민들과의 소통 단절이 낳은 참사다. 도어스테핑은 진작에 중단됐고 신년에도 취임 1주년에도 대통령의 정식 기자회견은 열리지 않았다. 국민과의 접점이 사라진 상태에서 국민 지지를 동력 삼아야 할 개혁이 진척될 리 만무하다. 우주항공청 신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등 경제 안보와 기업 활성화를 위한 제도 정비는 대부분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한 상태에서 해를 넘기게 됐다.
일차적인 책임은 국회에서의 압도적 과반 의석을 앞세워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는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하지만 거대 야당 탓만 할 수는 없다. 당파를 뛰어넘는 포용력과 소통 의지를 보이지 못한 대통령이나 야당을 대화 상대로 보지 않는 여당도 극한 대립과 정치 실종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론조사에서는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율 부진의 원인으로 미흡한 소통을 지적하는 의견들이 적지 않다.
새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대통령이 주재하는 신년 인사회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참석한다고 한다. 형식적인 자리겠지만 대화 재개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그러려면 한발 더 나아가려는 윤 대통령의 제스처가 필요하다. 올해 생략됐던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도 새해에는 재개됐으면 한다. 대통령이 직접 국정 운영에 관한 궁금증과 오해를 풀고, 국정 어젠다에 대해 국민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자리를 피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들과 국회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다면 집권 3년 차의 여정도 험난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학의 개척자로 알려진 미국의 정치학자 리처드 노이슈타트는 대통령의 힘이 끊임없는 설득에서 나온다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가 정치적 소통과 설득을 포기하면 정치 어젠다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가득하고 국정 과제가 산적한 2024년 대한민국에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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