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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정치의 승리, 도시의 패배

이혜진 건설부동산부장

여야, 총선용 개발 이슈몰이에만 치중

도시 경쟁력 높일 정책 아닌 '정치' 판쳐

시민의 삶 외면한 채 포퓰리즘 망령만

'혁신·번영' 이끌 도시정책 신중 기해야





혁신과 번영의 조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창의적인 인재 풀, 규제 환경, 정부 지원 등이 흔히 꼽힌다.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를 꼽았다.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며 그는 도시를 극찬했다. 얼마나 경쟁력 있는 도시를 보유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경제적·문화적 활력이 달라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과거에는 도시라 하면 전원과 대비해 범죄·질병·혼잡·환경오염 등이 연상됐다. 별로 인간적인 곳이 아니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런 인식은 제조업이나 무역의 시대에 도시들이 그 중심 역할을 했기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로벌 도시들은 혁신, 성장, 양질의 일자리, 풍성한 문화를 제공하는 행복한 삶의 전진기지가 됐다. 공장·기계 등 물리적 자본이 생산성을 결정하던 시대에서 인적 자본이 생산의 핵심이 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이고 교류하며 시너지를 내는 공간인 도시가 바로 성장의 엔진이 된 것이다.

도시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가 실리콘밸리다. 릴런드 스탠퍼드가 자신이 갖고 있던 약 100만 평의 말 농장 부지에 대학을 설립한 후 세계의 인재들이 모여들며 혁신의 발전소가 됐다. 고급 인재들을 자양분 삼아 오픈AI와 같은 첨단 기업들이 그곳에서 태어나고 번성한다. 미국이 금융과 기술의 최선두에 서 있을 수 있는 근간에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있다. ‘슈퍼 코끼리’ 인도의 경제가 질주할 수 있는 것은 뭄바이·벵갈루루 같은 글로벌 도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만 못한 유럽 국가들 중에서 영국이 여전히 맹주 노릇을 하는 것도 런던의 저력 덕택이다.

우리나라의 도시 경쟁력은 어떤 수준인가. 컨설팅 업체 AT커니의 글로벌도시지수 순위에서 서울은 2023년 기준 14위로 2020년 대비 5계단이나 뒷걸음질을 쳤다. 모리연구소 기준 도시 순위에서는 2015년 6위였으나 올해 7위다.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밀리는 중이다. 게다가 부산과 같은 다른 도시들은 순위 안에도 끼지 못하는 형편이다.



우리에게는 변변한 도시 정책이라는 게 없다. 부동산 정책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선거를 앞두고 도시 개발과 관련한 대형 정책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논의가 더 필요하다며 야당이 반대해왔던 노후도시특별법은 급물살을 타며 연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서울의 김포 편입을 통한 메가시티화, 전국 그린벨트 해제가 뜬금포처럼 터져나왔다. 물론 그 자체로는 당연히 필요하고 검토해볼 만한 사안들이다.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해당 지역의 표를 좀 얻어보기 위한 얕은 수라는 것이 빤히 보인다는 점이다. 김포 편입을 이슈로 던진 후 메가시티는 갑자기 정쟁거리가 돼버렸다. 노후도시특별법은 1기 신도시를 재구조화하는 법임에도 충분한 논의보다는 속도전에만 신경이 쏠려 있다. 대통령실이 띄운 그린벨트 해제는 이제 곧 총선을 앞두고 지방 나눠주기식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도시 정책을 담당하는 한 고위 공무원이 일갈했다. “도시 정책이 아니라 ‘도시 정치’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의 도시를 망치고 있다”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도시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표를 위한 정책이 난무하다는 얘기다. 좌우 가릴 것 없이 진영 논리에 갇힌 정책으로 도시를 망쳐왔다. 과거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개발은 가진 자와 토건족을 위한 악(惡)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억제하는 데 급급했다. 그사이 서울의 경쟁력, 한국 도시들의 경쟁력은 뒷걸음질을 쳤고 그 폐단을 지금 감당하고 있다.

선거를 몇 달 앞두고 포퓰리즘의 망령이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다. 도시 정책 혹은 부동산 정책 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재건축과 서울 편입, 그리고 그린벨트 해제를 통한 부동산값 상승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던지며 표심을 낚으려는 행태는 여와 야가 따로 없다.

도시 정책은 한 번 잘못되면 바로잡기가 더 힘들다는 점에서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정치에서는 그들이 승리하고 우리의 도시들은 패배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혁신과 번영의 열쇠가 도시에 있음은 미국이나 인도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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