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북측 순환로. 국립극장 옆으로 얕은 오르막을 지나면 시작돼 남산케이블카 입구까지 편도 3.4㎞인 이곳은 봄이면 벚꽃이, 가을이면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서울의 명소다. 그리고 달리기를 즐기는 마라토너들에게는 악명 높은 훈련 코스이기도 하다.
매주 토요일 아침, 이곳에서 2명의 주자들이 서로를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해 발을 맞추며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VMK)’와 그들의 동반 주자(가이드러너인 비장애인 주자)인 ‘빛나눔’ 회원들이다.
수년 전 주말 아침, 남산 길을 걷다 우연히 보게 된 그들의 질주는 필자에게 경이로움이었다. 비장애인 혼자서도 어려워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2명의 주자가 쏜살같이 옆을 지났다. 어떤 팀은 다소 느리더라도 서로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걷기에도 숨 가쁜 남산 길의 오르막을 행복한 표정으로 뛰었다.
이후에도 놀라움과 존경이 교차하는 감정이 가끔 걷는 남산 길에서 그들을 볼 때마다 커져갔다. 시각장애인과 동반 주자가 호흡을 맞추며 달릴 수 있는 그 비결이 궁금했다.
이기호 VMK 회장을 유선으로 만났다. 올해 칠순인 이 회장은 특수학교 교사를 정년퇴직한 후 60대에 마라톤을 시작했다고 한다. 8년여간 마라톤을 하며 열 차례 풀코스에 도전했다는 이 회장은 시각장애인이 동반 주자와 달릴 때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달릴 때 서로에게 연결된 끈을 일컫는 말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트러스트 스트링(Trust String)’입니다. 그 끈을 통해서 서로에게 믿음을 전달하는 것이죠.”
이 회장은 끈을 통해 전달되는 믿음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와 동반 주자가 서로를 믿고 차근차근 연습하다 보면 호흡이 맞게 됩니다. 그러면 두 사람 모두 달리는 게 많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지요.”
반대로 파트너의 눈이 돼줘야 하는 동반 주자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달리는 것일까. 60세에 동반 주자 활동을 시작해 8년째 달리고 있는 류기준 씨와 연락이 닿았다. “처음 ‘빛나눔’ 모임에 나가 교육을 받았습니다. 눈을 안대로 가리고 시각장애인이 돼서 달려보는 거죠. 앞이 안 보이니 세상 겁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반신반의였지만 동반자를 믿고 한 1㎞쯤 뛰니 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내가 잘 달리고 못 하고를 떠나 이분들한테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구나’라고요.”
조금 다른 사람들이 굳은 믿음 속에 끈으로 소통하며 달리는 깊은 가을 속의 남산, 그 밖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슬프게도 우리는 관심과 배려, 믿음과 소통과는 거리가 먼 갈등과 분열, 혐오와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대와 젠더, 노사, 지역과 직역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 갈등이 우선한다. 갈등은 분열과 혐오를 낳고, 각각의 진영과 세력 간 반목과 암투는 가히 전쟁 수준이다. 그 속에서 권력과 정치가 기생하며 힘을 키워간다.
갈등의 간극이 점점 커져가면서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기대했던 이들도 지쳐간다. 이렇게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맥레이니는 “누가 옳으냐를 따지는 대신 서로 의견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며 진정한 공감 속의 새로운 대화를 제안한다.
그는 특히 “투명한 태도는 신뢰를 낳는다. 신뢰가 일단 형성되면 의견 충돌이 있더라도 양측이 반대의 관점을 기꺼이 고려해볼 가능성이 커진다”고 강조했다.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방법. 2022)
다시 류 씨의 이야기다. “달리다 보면 과속방지턱도 나오고 오르막 내리막에 우회전·좌회전도 나옵니다. 그런 상황을 실시간 제대로 전달해줘야 시각장애인 주자들이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지요.” 세상을 달려가는 우리도 그들처럼 소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 믿음을 주고받으면서 넘어지지 않게.
극단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음이 불편한 사람들은 토요일 아침 남산 북측 순환로에 나와보기를 권한다. 그곳에서 ‘트러스트 스트링’을 꼭 잡고 다른 무엇도 아닌 ‘빛을 나누며’ 힘차게 달리는 그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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