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내리 5선 국회의원을 지내고 19대 하반기 국회의장까지 역임했던 원로 정치인이자 국내 뇌혈관 수술의 권위자로 손꼽혔던 의료인 정의화 전 의장에게는 또 하나의 얼굴이 있다. 바로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학창 시절 가족의 권유로 사진을 시작했다는 그는 국내 주요 언론사의 살롱전에 입상하는가 하면 부산대 의대 시절 대학생 신분으로는 드물게 개인전을 열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특히 국회의장으로 한창 일하던 2015년 여름 ‘정의화의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사진전을 열며 ‘사진 찍는 정치가’라는 별명을 대중에 각인시켰다.
그런 그가 9일부터 생애 세 번째이자 8년 만의 사진전을 열었다. ‘삶·Life’를 주제로 부산 해운대K갤러리에서 23일까지 초대전으로 진행된다. 지금도 사진을 향해 ‘어딜 가나 내 옆자리를 지키는 가장 사랑스러운 애인’이라며 찬사를 보내는 정 전 의장에게 사진의 매력을 묻자 뜻밖에도 ‘정직’을 말했다. 그는 “카메라는 정직하다. 구도를 잡고 촬영하면 거짓 없이 그대로 찍히는 게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이라며 “내 삶 속 가장 중요한 무기로 자부하는 가치가 정직이라는 점에서 사진을 사랑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사람, 정직한 사람의 얼굴은 그의 오래된 작품 주제다.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과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카메라에 손이 간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도 90%가 사람이다. 무거운 자루를 메고 걷거나 구두를 닦는 사람의 모습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밥을 먹는 일상의 순간에서 삶의 고단함과 위대함이 슬며시 비친다.
정 전 의장은 “어릴 때부터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던 것 같다”며 “사진을 통해 나의 그 연민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인간’ 시리즈로 주목받았던 사진작가 고(姑) 최민식에게 배운 경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여섯 살로 보이는 중남미의 형제 아이 둘이 양푼에 담긴 음식을 먹는 사진을 전시에서 만날 수 있을 텐데 특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라며 “내가 어린 시절 경험한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애잔한 기분을 준다”고 했다.
다만 최근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장엄한 풍경에도 마음이 끌린다고 한다. “나이가 든 탓”인지 자연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그는 최근 좋은 피사체를 찾겠다는 마음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는 중이다. 오래 손에 익은 캐논 5D 마크2와 70-200㎜ 줌렌즈를 어깨에 둘러메고서는 미국 국립공원 열다섯 곳과 프랑스 몽블랑, 스위스 알프스를 차례로 정복했다. 원하는 사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 유타주 아치스국립공원의 상징으로 불리는 ‘델리키트 아치’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기저귀까지 찾던 건 특히 잊지 못할 에피소드 중 하나다. “주차장부터 촬영 목적지까지 왕복 5㎞를 걸어야 했는데 화장실은 입구인 주차장에만 있고 도중에는 없는 거죠. 별수 없이 기저귀를 차고 등산을 했는데 그래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남겨 다행입니다.”
정 전 의장은 앞으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10년 후 85세를 기념하는 네 번째 전시를 열 계획을 밝혔다. 주제도 내심 정해뒀는데 ‘삶과 죽음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는 “어릴 때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5년간 했는데 스카우트의 구호가 바로 ‘준비’”라며 “그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준비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그 역시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들을 이어갈 참이다. 정 전 의장은 “지난봄 재활 중심의 봉생힐링병원을 개원했는데 안정적으로 발전해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여야 하고 부산 지역구에 자리 잡은 국회의장 기념관을 고향으로 옮겨오겠다는 개인적 바람도 현실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싱크탱크 ‘새한국의비전’을 통해 민주 시민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우리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도 이뤄나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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