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 방침을 밝히자마자 가장 뜨겁게 반응한 곳은 입시 학원가였다. 19일 자 서울경제신문을 보면 서울 강남과 목동 학원가는 아직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지도 않은 시점에 벌써 ‘2025학년도 수능 대비 예비 고3 수학 관련 설명회’를 열고 있다. ‘내신 1등급과 수능 수학 100점을 목표로 하는 대치 자연계 최상위 정규반 입시 전략’도 안내하고 있다.
기사에서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의대 입학 정원 확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좋은 대학에 가려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입시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게 정설이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을 넘어 유치원생까지도 입시 전쟁에 뛰어들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대학 입시에서 의대가 최고 인기를 얻은 지는 20년 남짓 됐다. 인기 학과는 시대 흐름을 반영한다.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던 1960년대에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최고 인재들이 화학공학과에 들어갔다. 1980~1990년대에는 과학기술 분야에 투자가 몰리면서 물리학과와 전자공학과가 수위를 차지했다. 이때까지는 경제가 고성장하던 시기여서 대기업에 취직하기만 하면 계열사 임원 정도는 넘볼 수 있었고 안정적인 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기업에 있어도 임원은커녕 쉰 살도 되지 않아 직장에서 나와야 하는 신세가 됐다. 결국 정년과 상관없이 오래도록 돈을 벌 수단으로 자격증이 중요해졌고 의사가 자연스럽게 최고의 직업으로 등극했다.
의대를 향한 쏠림 현상은 막판까지 왔다. 종로학원이 집계한 2023학년도 4년제 대학 이공계학과 입학 성적 톱10을 보면 한 곳도 빠짐없이 100% 의대다. 제아무리 서울대라고 하더라도 이공계 학과는 전국의 의대 정원이 모두 채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신입생을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의대 내에서도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종로학원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의대 재학 중 자퇴 등으로 중도 탈락한 학생 179명 가운데 77.7%가 지방대 의대생이었다. 지방대 의대생이 서울 소재 의대 입학을 위해 재수·삼수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5% 남짓하던 잠재성장률이 내년에는 마침내 1%대로 주저앉는다. 잠재성장률이 미국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급락한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사람 부족이요, 인재 부족일 것이다. 인구를 갑자기 확 늘릴 비법은 없다. 의대가 인재의 블랙홀이 된 지금의 상황을 바꿔야 그나마 우리나라의 미래를 꿈꿀 수 있다.
의사는 고도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머리가 우수해야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창의성보다는 반복된 학습과 경험이 필요한 직업이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인재는 이공계에서 꿈을 펼쳐야 한다. 그것이 개인은 물론 나라에도 도움이 된다.
이공계는 지금 인재 수혈이 시급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반도체는 2033년까지 7만 명의 인력이 부족해진다. 2027년까지 인공지능(AI)은 1만 2800명, 빅데이터는 1만 9600명, 나노는 8400명의 인력이 필요하다.
이공계 인재 확보를 위해 투자와 지원을 해도 시원찮을 텐데 정부는 반대로 인재 유출을 부추기고 있다. 이제껏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던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통령의 “나눠먹기식·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한마디에 16.6% 깎였다. 그렇잖아도 춥게 지내던 과학 인재들이 더는 버틸 수 없어 R&D 현장에서 떠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바보가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겠는가.
이공계에 인력을 끌어들이려면 과학자도 의사만큼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2021년 개원의 평균 소득은 2억 6900만 원이었다. 지난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출연연구기관 정규직 평균 연봉은 9370만 원, 무기계약직은 4821만 원이었다. 깎인 R&D 예산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의사와의 차이는 더 벌어질 것이다. 정부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R&D 예산부터 되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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