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세대의 삶은 나보다는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묻는 말이자 실존적 질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가 나아질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발전과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국책 연구원인 한국행정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10명 중 2~3명만이 본인 세대와 자식 세대에서 계층 이동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고 한다. 2021년 기준 한국인의 25.2%가 본인의 세대에서 노력에 의한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이 가능할 것으로 인식했다. 자식 세대에 사회 이동 가능성이 있다고 본 사람은 29.3%였다.
10년 전 똑같은 조사 결과를 보면 머리가 무거워진다. 2011년 사회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본인 세대에서 32.2%, 자식 세대에서 41.4%였다. 10년 사이에 미래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늘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1년 출간한 ‘설득의 에세이(Essays in Persuasion)’에서 100년 뒤 인간의 삶의 수준이 나아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100년이 지난 뒤 경제학자들은 꼭 그렇지 않다고 비판한다. 현대인의 삶이 100년 전보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들과의 상대적 빈곤 차이를 크게 느끼면서 되레 더 불행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발 앞서 미국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65년 전인 1958년 펴낸 ‘풍요로운 사회’에서 인간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더 큰 빈곤을 느낄 수 있다고 갈파했다.
인공지능(AI)이 일상생활 속을 파고들면서 현대사회의 갈등과 상대적 박탈감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증기기관과 전기의 발명으로 시작된 ‘제1의 기계 시대’에 느꼈던 인간의 소외감보다 디지털 기술과 AI의 발전이 가져온 ‘제2의 기계 시대’에서 느끼는 인간의 실존적 위협이 더 클 수 있다고 철학자들은 경고한다. 에릭 브린욜프슨과 앤드루 맥아피는 ‘제2의 기계 시대’라는 저서에서 인간과 디지털 노동력의 결합으로 슈퍼 리치의 부는 증가하지만 중산층 이하의 소득은 줄어들 것이라며 기술이 가져온 소득 격차가 사회에 독이 될 수 있다고 꼬집는다.
디지털 디바이드(디지털 격차)가 심화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소외된 약자 계층에 대한 체계적인 도움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단기적이며 임시변통인 처방에 집중하면서 인기몰이에 나선다.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평범한 시민이 차지해야 할 경제적 성과와 행복을 소수 슈퍼 리치가 독점한다고 선전하며 무분별한 퍼주기에 힘을 싣는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이미 중남미 국가에서 확인한 재정 적자와 빈부 격차의 심화, 사회 갈등 증폭이다. 반대로 우파 포퓰리스트의 폐해도 적지 않다. 그들은 이민자와 외국인 노동자, 난민, 여성, 성 소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마녀 사냥에 나선다. 양극화 갈등의 시대에 가장 큰 피해자들을 되레 가해자로 바꿔 놓는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약자동행지수’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EU) 등에서 약자 관련 지수를 만든 사례는 있지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성과와 연동한 지수 체계를 만든 건 서울시가 처음이라고 한다. 매년 산출된 지수를 바탕으로 사각지대를 없애고 약자를 보듬어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취지일 것이다. 누구든 먼저 해야 하지만 성과에 대한 부담이 커 주저했을 일인데 시장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니 결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분야의 지표 개선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교육과 문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대한다.
디지털 격차로 인해 신기술과 문화 소외자들의 빈곤은 더욱 심화할 수 있다. 약자들을 보듬는 사회 정책에서 문화적 소외 계층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들의 빈곤이 가장 극단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문화적인 여유와 호사를 즐길 시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문화적 소외에서 벗어난다면 거꾸로 그만큼 사회가 건강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단단해졌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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