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조 원. 내년도 국가 예산이다. 올해에 비해 2.8% 늘었으나 증가율은 2005년 이후 가장 낮다. 수출이 줄고 내수 부진으로 세수가 감소하면서 나라 살림살이가 빠듯해졌다. 나라 곳간이 비면서 급격한 환율 변동에 대응하기 위한 기금인 외국환평형기금까지 손대야 하는 처지다.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내년 나랏빚은 61조 원 넘게 늘어 1200조 원까지 불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의 ‘짠물 예산안’ 발표 이후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연구개발(R&D) 예산이 대폭 삭감된 과학기술계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내년도 정부 R&D 예산은 25조 9000억 원으로 올해(31조 1000억 원)보다 16.6% 깎였다. 과학자들은 “일방적인 R&D 예산 삭감은 과학기술을 무시하고 연구 현장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들에서는 비정규직 연구자들이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정부는 나눠 먹기 식 등 그릇된 관행을 혁파하고 혁신적이고 국가 임무 수행에 필요한 R&D 투자는 강화한다는 방침이지만 과학기술계의 반발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5일 전국공공연구노조를 중심으로 출범한 ‘국가 과학기술 바로세우기 연대회의’는 R&D 예산의 원상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이 과학자들을 만나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자리를 만든다니 지켜볼 일이다.
교육계도 비상이 걸렸다. 초중등 교육에 쓰이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교육교부금)이 올해보다 9.1%가량 감액된 탓이다. 교육교부금은 내국세의 일정분으로 마련되는데 세금이 덜 걷히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학령인구가 감소해도 크게 늘어나면서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던 교육교부금이 내년에는 7조 원 가까이 감액되면서 많은 사업들이 없어지거나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각 시도교육청이 갖고 있는 21조 원 규모의 재정 안정화 기금을 일부 빼서 쓸 수는 있지만 가급적 아껴두고 불요불급한 사업을 구조 조정하는 것이 맞다.
교육과 과학기술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먹고 입는 것을 줄일지언정 자녀 교육비에는 손대지 않듯 나라의 동량(棟梁)과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교육과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늘리는 것이 온당하다.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옛말은 ‘현재를 위해 미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국회의 예산 심의 과정에서 정부 편성안을 보다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조정이 이뤄졌으면 한다. 야당이 송곳 심사를 벼르고 있지만 ‘세수 펑크’가 난 상황에서 큰 폭의 수정과 변화가 있을지 의문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R&D 시스템을 혁신하고 교육재정 제도를 개선했으면 한다. ‘이권 카르텔’까지는 아니더라도 R&D 예산이 상당 부분 나눠 먹기 식으로 쓰였고 성과도 미흡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과학자들도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예산이 줄었지만 치열하게 경쟁해서 타낸 연구비로 보란 듯 성과를 만들어냈으면 한다. 나랏돈을 마치 자신의 쌈짓돈처럼 이곳 저곳에 골고루 퍼주고 허술하게 관리한 공무원들도 정신차려야 한다. 욕을 먹더라도 경쟁력 있는 연구자를 집중적으로 지원해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국세수에 따라 변동성이 심한 교육교부금 제도도 손질해야 한다. 내국세와 기계적으로 연동하는 현 제도는 불안정할 뿐 아니라 학령인구 감소와 같은 인구구조 및 교육 환경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교육교부금이 감액된 시점이 제도 개선을 논하고 근본 처방을 할 좋은 기회다.
급격한 다이어트는 반드시 부작용을 부른다. 대규모 예산 삭감·감액으로 발생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과학기술계와 교육계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R&D의 효율성을 높이고 30년, 50년 뒤를 내다보는 교육재정 제도 마련으로 기초 체력을 다진다면 예산 삭감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본디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다. 예산 삭감이 ‘양약(良藥)’이기를 바랄 뿐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