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을 때 많은 찬사를 받아봤기 때문에 잘못했을 때 비난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14년 월드컵이 끝난 후에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과정을 떠나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으니 말이죠. 저를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와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실패한 감독이었기 때문이죠.”
홍명보(54) 프로축구 K리그1 울산 현대 감독은 최근 울산의 현대스포츠 클럽하우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2014년 국제축구연맹(FIFA) 브라질 월드컵 직후인 9년 전을 떠올렸다.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90년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처음 단 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살아왔던 그가 한순간에 한국 축구의 역적이 된 시점이었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미디어와 여론은 등을 돌렸다. 하지만 홍 감독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에서 배우는 것들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며 “그때의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 실패한 뒤 좌절한 채 숨어 살았다면, 울산의 감독으로 K리그 우승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감독은 선수 시절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불렸다. 그에게는 늘 ‘최고’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주전 수비수 조민국이 부상을 당해 대안으로 국가대표팀에 뽑혔고 본선에도 출전해 조별리그 3경기에서 풀타임 활약을 펼쳤다. 비록 한국은 3전 전패로 탈락했지만 홍명보만큼은 한국 축구의 향후 10년을 책임질 수비수로 각광을 받았다.
2년 뒤인 1992년에는 포항제철 아톰즈(현 스틸러스) 유니폼을 입고 프로축구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해 팀의 우승과 함께 신인 선수로는 최초로 최우수선수상(MVP)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다시 2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무대가 됐다. ‘무적함대’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1차전(2대2 무)에서 0대2로 끌려가던 후반 40분 프리킥 골을 넣었고 ‘전차군단’ 독일과의 최종전(2대3 패)에서도 1대3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림 같은 중거리 슛을 성공시켜 한국 축구 최초로 월드컵 한 대회에서 멀티골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자신의 네 번째 월드컵인 2002년 한일 대회에서는 대표팀 주장으로서 4강 신화를 일궈냄과 동시에 아시아 선수 최초로 브론즈볼(MVP 3위)을 수상했다. 월드컵 본선 무대를 4회 연속으로 밟은 것도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홍명보가 곧 한국 축구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2004년 화려했던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홍 감독은 2005년 국가대표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연령별 대표팀 감독을 차례로 맡으면서 경력을 쌓았다. 홍 감독은 “저는 한국 축구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부터 많은 분의 도움을 받았다”며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 전 국민의 열렬한 응원과 사랑을 받았고 4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제가 은퇴 후에 지도자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축구인으로서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지도자’ 홍명보는 시작부터 성과를 냈다. 2009년 이집트 20세 이하(U-20) 월드컵 8강을 이끈 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23세 이하(U-23) 대표팀과 함께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 획득의 역사를 썼다.
하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점으로 20년 넘게 쌓아온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월드컵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소방수로 투입된 그에게도 1년이라는 시간은 월드컵이라는 큰 시험을 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당시 홍명보호는 조별리그 3경기에서 1무 2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귀국길에 올라 공항에서부터 ‘엿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귀국 직후에는 대표팀을 둘러싼 논란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악의적으로 보도되면서 책임자로 지목된 홍 감독은 끝내 지휘봉을 내려놓아야 했다. 홍 감독의 축구 인생에서 첫 번째 시련이었다.
사실이 아닌 논란에 대해 왜 해명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홍 감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제가 직접 나서 해명한다고 해도 믿을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그는 “사실 대표팀을 맡을 때부터 실패할 것을 알았다. 1년 만에 월드컵을 준비하는 것은 욕심이었다”면서도 “그때를 돌아보면 제가 아니면 감독직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그보다 2년 전에 한 차례 거절한 자리이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앞서 말했듯이 저는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한국 축구가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랐다. 실패할 것을 알았다는 말이 안 좋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준비 기간에 주어진 환경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홍 감독은 ‘의리 축구’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받았다. 월드컵 최종 명단에 런던 올림픽 동메달 멤버들이 12명이나 포함되는 등 잘 아는 선수 위주로 발탁했다는 게 논란이 됐다. 그중에는 소속팀에서 꾸준한 기회를 받지 못하는 선수들도 포함돼 있었다. 홍 감독은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하면서도 “2009년에는 U-20 대표팀을 이끌었고 2012년까지 U-23 대표팀에 선발될 선수들만 관리했었다. K리그 경기를 보러 가도 23세 이하 선수들 위주로 관찰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1년이라는 시간이 문제였다. 부임 후 9월과 10월, 11월 A매치 기간 K리그 선수들을 실험해보기도 했지만 감독과 선수로서 신뢰를 쌓을 시간이 부족했다”며 “최종적으로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선수를 데리고 월드컵에 나가는 것보다 플레이스타일·성향·인성 등 모든 면에서 파악된 선수들을 선발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홍 감독은 실패를 경험한 후 약 1년간 야인 생활을 했지만 2015년 말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그린타운의 감독직을 맡으면서 현장으로 돌아왔다. 2017년에는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에 선임돼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협회 전무로 일하면서 자신의 감독 경험을 살려 현장을 우선시하는 정책 등을 펼쳤는데 그중 하나가 파울루 벤투 전 감독의 4년 임기 보장이었다. 홍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 때 제게 주어진 1년은 누구에게나 부족한 시간이었다. 벤투 감독을 선임할 때도 월드컵을 준비하는 감독에게는 4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며 “벤투 감독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을 때도 자르면 안 된다고 했다. 벤투 감독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도, 저와 같이 짧은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감독이 오는 것도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냈다”고 했다. 그 결과 벤투 감독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12년 만의 16강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다.
2020년 12월 K리그 울산의 제11대 사령탑으로 선임된 홍 감독은 2년 차였던 지난 시즌 울산을 우승으로 이끌며 지도자 인생의 제2막을 열었다. 앞서 1996년과 2005년 K리그 정상에 섰던 울산의 17년 만이자 통산 세 번째 우승이다. 선수 시절 1992년 K리그 우승과 신인 선수 최초의 MVP 수상,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지휘 등을 이룬 홍 감독은 2022년 K리그 정상에 서면서 ‘홍명보 10년 주기설’을 입증했다. 홍 감독에게 10년마다 대운이 찾아온다는 가설이다. 그는 “지난해 우승을 계기로 10년 주기설을 1년 주기설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는데 울산은 올 시즌 초반부터 2위와의 격차를 10점 차 이상 따돌리며 단독 선두로 질주하고 있다.
지난해 우승과 올해 독주 체제의 공을 인정받은 홍 감독은 이달 2일 울산과 3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구단에 감사하다”며 “한편으로는 조금 더 큰 책임감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울산을 지금보다 좋은 팀으로 성장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재계약으로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내국인 감독의 첫 10억 연봉 시대를 홍 감독이 열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많은 연봉을 받는 게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저로 인해 축구를 포함한 다른 스포츠에서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면서 “9년 전 실패에 그쳤다면 지금의 저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우승으로 인해 팬들의 시선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또 우승을 못할까 두렵거나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제가 축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또 실패할지언정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홍명보 10년 주기설’이 이어질 2032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홍 감독은 “10년 뒤에 제가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축구라는 틀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축구협회 전무를 할 때 우리나라 축구가 전반적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최근 여자 월드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는데, 여자 축구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모든 축구가 함께 발전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