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이 불편한 90세 노모를 모시고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한 50대 하 모 씨. 감기 기운이 가라앉지 않아 폭우를 뚫고 병원을 찾았지만 예약 없이는 오늘 진료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맥이 풀렸다.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는 얘기에 소견서를 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13일 공공의료 인력 확충 등을 주장하며 19년 만에 대규모 총파업에 돌입하면서 의료 현장 곳곳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파업으로 간호 인력이 부족해진 병원은 입원 환자들의 퇴원일을 앞당기기도 했고 진료 예약을 중단하는 등의 차질이 빚어졌다.
의료계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부터 보건의료노조 산하 122개 지부 140개 사업장(의료기관) 소속 노조원 4만 5000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아침부터 각 병원에서는 노조원들의 출정식이 진행됐으며 이후 노조원들은 오후 1시 30분께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결집해 ‘2023 보건의료노조 산별노조 파업대회’를 진행했다.
이날 오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은 소속 노조원 650여 명이 모여 출정식에 참여하면서 오전 중 소화기센터 관련 진료나 검사를 아예 진행하지 않아 한산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소화기센터 인근에는 환자가 한 명도 없었고 내시경실에도 불이 꺼져 있었다. 이 병원 관계자는 “내시경 검사나 진료를 예약했던 환자들에게는 미리 안내해 예약 날짜를 싹 다 미룬 상태”라고 설명했다.
파업의 영향으로 예정보다 빠르게 퇴원하게 된 환자도 있었다. 12일 요로결석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 정 모(59) 씨는 “어제 수술을 해 원래 내일까지 입원했어야 하지만 파업 때문에 오늘 퇴원하게 됐다”면서 “다행히 수술 및 퇴원 과정에서 불편한 점이 따로 없었고 몸도 괜찮은 상태라 집에 간다”고 말했다.
국립중앙의료원도 환자들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오전 국립중앙의료원 1층 접수·수납 창구는 일부만 운영하고 있어 한산한 모습이었다. 파업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예약 없이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고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이영배(71) 씨는 “원래 오늘 백내장 수술이 예정돼 있었는데 병원 사정으로 수술을 연기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대화나 협상 없이 무조건 파업에 돌입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얼굴을 붉혔다.
파업에도 큰 혼란 없이 진료를 진행한 병원들도 있었다. 고대안암병원은 이날 오전 10시 30분께 노조원 500여 명이 병원 2층 로비에서 출정식을 가지며 파업에 참여했으나 진료는 별다른 차질 없이 이뤄졌다. 진료가 예약제로 진행돼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들은 파업을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보건의료노조 조직부장은 “필수 인력 협약대로 인력을 남겨 놓은 상황이라 남아 있는 분들이 고생하고 계시지만 진료에 큰 차질은 빚어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암센터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70대 여성 환자 정 모 씨는 “병원에서 아무런 연락도 받은 게 없다”며 오히려 “오늘 병원에 무슨 일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각 병원에서 출정식을 연 노조원들은 오후 1시 30분부터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보건의료노조 총파업 결의대회’를 열었다. 결의대회에는 주최 측 추산 2만 여 명이 집결했다. 노조원들은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돼 비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우비를 입고 자리에 앉아 ‘국민 건강 지키는 산별 총파업 승리’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전면 확대’라고 적힌 손 피켓을 들었다. 고대안암병원 출정식에 참가한 서울지역본부장은 “신규 때부터 항상 병원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왜 계속 인력 확충을 파업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느냐. 제대로 된 간호를 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이날 요구 사항으로 비싼 간병비 해결을 위한 간호 간병 통합 서비스 전면 확대, 환자 안전을 위한 간호사 대 환자 비율 1 대 5 제도화와 적정 인력 기준 마련, 무면허 불법 의료를 근절하기 위한 의사 인력 확충, 필수의료 책임지는 공공의료 확충, 코로나19 전담 병원 정상화를 위한 회복기 지원 등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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