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 세계 전략산업 설비의 블랙홀로 부상하고 있다.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을 통해 관련 산업 시설 투자에 대해 공격적인 세금 혜택을 제공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을 미국으로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 같은 노력은 전략산업과 경제안보에 대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유도한 2001년 당시와 비교하면 정반대의 행보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전 세계 무역 질서에 편입되면 중국의 체제가 변화되고 다른 공산국가에도 영향을 미쳐 글로벌 시장 질서가 더 자유로워질 것으로 판단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를 위해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중국에 ‘항구적 정상 무역 관계(PNTR)’ 지위를 부여했다. 그렇게 중국은 WTO에 가입한 뒤 값싼 노동력을 무기로 전 세계 공장으로 발돋움했다.
반면 미국은 전략산업 제조 시설에 대한 경쟁력을 잃고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 의존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은 1990년대 전 세계의 37%를 차지한 후 최근 12%까지 하락했다. 중국 등 아시아 국가가 전 세계 반도체 생산 시설의 75%를 확보한 가운데 반도체 수탁 생산 업체 1~3위가 모두 대만과 한국에 있을 정도다. 전기차용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거리를 높일 수 있는 배터리 음극재의 핵심 원료를 중국산 리튬과 니켈 등에 의존해 에너지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
이에 미국 행정부는 지난 20여 년간의 정책을 뒤집기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으며 자국 이익 우선주의 행보를 노골화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법을 통해 보조금을 받게 되는 현지 진출 한국 기업들은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따라 중국 등에서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내에서 확장할 수 있어 한숨을 돌렸지만 또 다른 족쇄를 차게 됐다. 여기에 삼성전자 등은 초과이익 환수와 군사용 반도체 우선 공급 등 경영개입 우려가 큰 보조금 수혜 조건에 묶여 경영 활동 제약도 받을 것으로 우려된다.
문제는 이 같은 미국의 전략 산업 유치 전략에 대처하는 한국의 안이한 자세다. 여야는 이날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첨단 전략 산업에 세액 공제를 확대하는 조세특례법 개정안을 합의 처리했다. 대기업에 대한 시설 투자 세액 공제율을 기존 8%에서 15%로 7%포인트 상향 조정하는 조치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첨단 전략산업 시설 투자에 대한 대기업 세액 공제율은 전기차와 반도체에 대해 25%의 시설 투자 세액 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미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양국 간의 세제 혜택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이 지속한다면 국내 반도체와 이차 전지 생산 능력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이 국내 설비 투자를 확대하고 고용을 창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특법 개정안이 한국 첨단 전략 산업 지원의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대 규모의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에 20년간 300조 원을 투입하는 계획이 다른 대기업의 투자 신호탄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난해 말 1% 인하에 그친 법인세 최고세율을 더 낮춰 글로벌 조세 경쟁력을 높여야 할 것이다. 17%(과세표준 1000억 원 초과)에 갇힌 법인세 최저한세를 적용하면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이 반쪽에 그치는 기업 환경을 개선해줘야 한다. 한국 기업이 미국의 전략 산업 블랙홀에 빠지지 않고 국내에서 생존하려면 규제 등 기업의 모래주머니를 하루빨리 떼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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