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의 일이다. 그해 5월 저소득층 소득이 급감해 1분기 소득 격차가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통계청 발표가 나오자 당시 청와대는 표본 설계의 적절성 문제를 제기하며 발끈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통계청 자료 기준을 가구별이 아닌 개인으로 변경한 당시 강신욱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보고서를 근거로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 효과가 90%”라는 주장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석 달 후 통계청장은 황수경에서 강신욱으로 교체됐고 통계청의 통계 표본수와 조사기법 변경, 개선된 소득분배지표의 발표가 뒤따랐다. 국가 통계에 ‘나쁜 손’이 개입한 악성 사례다.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새롭게 선택된 윤석열 정부는 그때와 달라야 한다. 하지만 얼마 전 통계청이 한국 경제의 저점을 코로나19가 대유행했던 2020년 5월로 잠정 설정한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이 확장 국면이라고 진단을 내린 셈인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경제 실적을 과대 포장하는 통계적 손질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러잖아도 기획재정부가 별다른 근거 없이 하반기 경기 낙관론을 내놓아 빈축을 사고 있는 판에 통계청까지 이전 정부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인다면 정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수도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정부의 노골적인 시장 개입이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윤 대통령은 그 선봉에 선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올해 1월 말 윤 대통령이 “은행은 국방보다 중요한 공공재적 시스템”이라고 말하자 뒤이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은행의 영업 방식은 약탈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15일에는 윤 대통령이 “공공요금은 최대한 상반기 동결 기조로 운영한다”고 밝히고 한 주 지나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기·가스 등 에너지 요금은 국민 부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정치적 압력을 가해 시장을 통제하면 일시적인 효과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외압을 무한정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억눌렸던 가격은 나중에 더 많이 오르고 그 고통은 서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이 크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생활 밀접 품목 52개를 선정해 시장에 강한 압박을 가했지만 해당 품목의 물가가 더 크게 상승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던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어느 대기업 회장이 한국 정치는 4류라고 해 큰 파문이 인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4류임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고백했다. 1995년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 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했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그렇다면 현 정부도 4류 정치와 3류 관료로 2류인 기업을 통제하고 간섭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에 맞서다가 자멸했다. 소득이 소득을 만들어낸다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앞세워 최저임금을 과도하게 인상해 자영업자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공공 부문 중심의 일자리 정책은 노동시장을 혼란에 빠뜨렸다. 수요 공급의 원리를 무시한 규제 중심의 부동산 정책은 집값 폭등을 유발해 집 없는 서민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줬다. 법인세 세율을 25%로 올리고 노동조합을 우대하는 정책도 시장의 요구를 역행한 것이었다.
문 전 대통령은 시장의 적인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장에 적대적인 정책을 남발해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든 탓에 정권을 잃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9일 당선 1주년을 맞는 윤 대통령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고 기대도 크다. 하지만 국민연금기금운용위 전문위원에 검사 출신을 앉혀놓고 “국민연금 수익률 높이는 특단의 대책”을 지시하는 윤 대통령의 모습은 왠지 어색하고 미덥지도 못하다. 대통령실과 정부의 핵심 직위에 검사 출신들을 중용한다고 4류 정치가 갑자기 1류로 높아질 것이라고 믿을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편협한 인사와 어설픈 가격 개입은 그만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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