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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개봉한 배두나, 김시은 주연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 감독)가 값진 5만 관객을 돌파했다. 연출적인 완성도와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 입소문을 탄 덕분이다. 배두나는 ‘다음 소희’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소희(김시은)의 죽음을 파헤치는 형사로 등장한다. 그는 20년 전 고등학생 소희와 비슷한 나이의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감독)에서 배두나는 여자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태희를 연기했다. 태희는 ‘다음 소희’의 소희와 다른 듯 닮아 있다.
“저도 배를 탈 수 있을까요?” 태희는 맥반석 체험 찜질방 전단지를 돌리려 선박 사무실에 들어가 묻는다. 우리가 타는 건 유람선이 아니라는 조소 섞인 답변에 태희는 당돌하게 대꾸한다. “저도 유람선 타려는 건 아니에요.” 허무하게 무산됐지만, 이런 태희의 물음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람선이 아닌 진짜 배를 타고 싶은 태희의 마음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전단지로부터 비롯된다. 태희는 일을 시키는 아빠와 답답한 가족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여상을 졸업한 스무 살 태희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갈림길에 섰지만 그다지 치열하지 않다.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다른 적성을 찾기 위해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버지가 시킨 찜질방의 카운터 지키는 일을 하며 작년과는 조금씩 달라진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볼 뿐이다. 같은 상업고를 함께 마친 다섯 친구들에게 번갈아가며 연락하는 일이 지금의 그가 가장 부지런히 임하는 일과다.
지영(옥지영)은 한층 더 적나라하게 막막한 인물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판자촌에서 대충 얹어 놓은 콘크리트 파편들 사이로 그의 집이 보인다. 조부모님과 셋이서 함께 살면서 일자리를 구하려 애쓰는 그의 사연을 영화가 늘어놓지 않아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지영이 집과 밖을 오가는 길에는 꼭 지나야 만 하는 골목길이 있다. 사람 한 명만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의 비좁은 길목 역시 지영의 처지와 맞닿아 있다. 청춘의 한가운데 서 있는 지영의 앞에 놓인 미래는 열린 들판이기보다 하나의 좁은 길에 가까워 보인다. 지영에게 스무 살이 무궁무진하기보다 섧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영과 친구들이 좁은 골목길을 일렬로 줄지어 걸어가며 수다 떠는 장면은 그래서 영화 전체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른바 주변부 인물인 태희와 지영이 다른 인물들에게 찾아가는 과정에는 지하철이 주 무대로 전개된다. 영화는 시퀀스 사이 인물의 이동을 생략하지 않고 각종 교통수단 안에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울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홀로 먼저 헤어지는 지영의 귀갓길에서 열차 안 풍경이 유독 도드라진다. 지영과 혜주(이요원)가 다투었던 곳들이 개찰구 사이, 역사 내 복도, 역의 출구 앞 등으로 모두 지하철과 연관이 있다는 점 역시 의미 있다. 중심도시와 주변 도시를 잇는 지하철을 매개로 인물의 심경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적 미장센은 혜주의 생일파티가 끝나고 기다랗게 늘어진 ‘부평역 지하상가’를 뛰어가는 다섯 친구들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속 인물들이 분투하는 청춘의 여정은 장면마다 보이는 실제의 길들과 겹쳐 보이며 삶의 여러 복잡한 경로라는 비유적 의미를 표현한다. 해당 지하상가 장면은 영화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2020)에서도 오마주 됐다.
이렇듯 ‘고양이를 부탁해’는 풍경과 미장센의 영화다. 영화 속 모든 신의 배경은 예쁜 장식으로서의 미적 요소가 아니라 외적인 서사를 부여하며 기능한다. 힘에 겹고 텁텁한 일상 속에서 또래 친구들이 공유하는 감정은 대사로 설명되기보다 풍경으로 보일 때 더욱 효과적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배경과 색채로 회색의 삭막한 환경이 보인다고 해서 영화가 암울한 처지를 비관하거나 절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다섯 명의 친구들이 고양이를 건네며 주고받는 건 결국 의지와 희망이겠다. 구색을 갖춘 사회인이 되고자 야심을 품고 서울로 나가는 혜주는 출근길에 고양이를 지영에게 맡기고, 스스로를 위해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태희는 고양이를 비류(이은주)와 온조(이은실)에게 남긴다. 그 사이 지영은 고양이 발자국으로 그림에 서명을 남기며 꿈을 키웠고, 지영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됐을 때 태희에게로 넘어온 고양이는 태희의 결심에 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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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와 지영이 계단에 걸터앉아 워킹홀리데이에 대한 꿈을 나누는 뒤의 배경으로 위생모와 앞치마를 두른 식품 공장 아주머니들 여럿이 지나간다. 갖가지 있을 법한 풍경들을 인물의 처지와 엮어 실제적으로 묘사한 영화가 딱 한 군데 비현실을 그린 장면은 태희의 상상신이다. “그 어느 곳에서든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흐르면서 사는 거야, 배 안에 누워서 지나가는 구름도 보고 책도 읽고.” 다소 맹랑한 듯 보이는 상상신에서 태희는 영화의 어느 때보다 가벼운 모습으로 눈을 감고 물 위에서 부유한다. 배를 타고 싶은 태희가 터무니없는 상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은 치밀하다. 영화에서는 그의 발돋움을 독특한 가족사진으로부터 이어와 보여준다. 깊이 있는 비유와 섬세한 연출이 흔들리는 이들을 건강하게 표현해 여운을 주는 영화다.
◆시식평 : 어른이 되는 갈래에 서 있는 청춘들에게.
+요약
제목 : 고양이를 부탁해
극본 : 정재은
감독 : 정재은
출연 :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이은주, 이은실
배급 :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엣나인필름
장르 : 드라마, 코미디
등급 : 12세 관람가
볼 수 있는 곳 : 네이버 시리즈온, 티빙, 웨이브, 쿠팡플레이, 넷플릭스,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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