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시장 격리를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단독 통과된 다음 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속도전으로 권한을 행사한 대표적 사례”라고 자평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에도 과도한 예산 투입 등에 대한 우려로 보류됐던 법안이 느닷없이 대표적 민생 법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의석 수에서 밀린 국민의힘은 기자회견을 열어 “날치기”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의회 권력을 쥔 거야(巨野) 앞에서 여당은 자중지란에 당내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전략·전술도 없이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21일 국회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양곡관리법은 거야 독주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 대표가 주문한 ‘속도전’에도 주목해야 한다. 21대 국회가 열린 2020년, 경제계와 국민의힘 등의 속도 조절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국민의 뜻이라며 경제 3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안 등을 일사불란하게 통과시켰는데 올해도 이 같은 입법 독주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는 야당의 반발로 정기국회 통과가 불투명하다. 집권 첫해임에도 정기국회에서 국정 과제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여당의 출현이 임박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기국회가 시작됐지만 반도체특별법 개정안과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 부담을 낮춰주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중대재해법 개정안 등 핵심 국정 과제들은 상임위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새 지도부를 꾸린 민주당은 정부 여당의 주요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결사항전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대표는 이날 정부 여당을 겨냥해 “연간 13조 원의 초부자 감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서민의 삶을 악화시키는 잘못된 예산을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강조했다.
여당의 내전과 강성 지지층만 바라보는 야당 지도부의 행태 등이 겹치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한 입법은 올해 정기국회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비관 섞인 전망이 제기된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정부 여당이 의회 권력을 여전히 야당에서 갖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힘겨루기에 나서면 오히려 빈털터리 신세로 정기국회를 종료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민주당에 맞서 입법 성과를 내려면 중도층 등 여론의 지지가 필수다. 거대 야당을 상대하기 위한 유능한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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