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이슬람 무장조직 알 카에다가 주도한 9.11테러는 미국 안보정책 대전환의 시발점이 됐다. 이는 한미동맹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핵심 동맹국에게 이른바 ‘핵우산’ 등을 제공하는 안보공약인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정책에서 핵무기의 비중을 낮추고 재래식 무기의 역할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정책변화는 미국의 2002년 국방검토보고서(QDR)를 통해 공식화됐다. 미국이 핵전략의 무게 중심을 옛 냉전기부터 고수해온 핵전략인 ‘핵 3축 체제(Nuclear Traid)’에서 ‘신 3축 체제(New Triad)’로 옮긴 것이다. 기존 핵 3축 체제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의 3가지 핵전력을 주축으로 삼아 적의 도발을 억제했다. 반면 신 3축 체제는 적에 대한 타격능력(핵무기 및 비핵무기를 복합한 보복능력), 미사일방어, 연구개발 및 방위산업을 주축으로 삼는다.
미국이 안보전략에서 핵무기의 비중을 조정하고 대신 재래식 무기의 역할 한층 강조하자 미국 핵우산에 기대어 온 동맹국들의 우려를 샀다. 미국이 제공해온 핵우산에 구멍이 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증폭됐다. 특히 우리 국민들은 유사시 미국이 자국 본토가 핵공격을 받을 위험을 감수하고 대한민국을 위해 핵우산을 작동시킬지 여부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논란에 대응해 한미가 핵우산를 총체적으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양국 국방-외교당국의 차관급 인사들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4년 8개월만에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회의를 열고 확장억제 이행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무려 4시간 30여분의 마라톤 회의였다. 그 결과 한미는 고위급 EDSCG의 정례화(매년 개최), 북핵 공격에 대한 압도적-결정적 대응 등의 원칙에 합의해 이를 공동성명으로 명시했다. 한미는 우주 및 사이버영역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기로 해 북한이 핵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WMD)로 대남 공격을 시도할 경우 발사 전에 우주 및 사이버공간에서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것임을 시사했다.
확장억제 이행력 제고를 위한 더 큰 진전은 이번 회의 이면에서 이뤄졌다. 정부 고위당국자에 따르면 한미는 확장억제 강화를 위해 ‘공동 기획’ 등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공유하기 위해 운용하는 핵기획그룹(NPG)을 연상케하는 대목이어서 주목된다. 이번 제 3차 한미 고위급 EDSCG를 계기로 한미간 확장억제 정책이 나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美확장억제 정책에 우리 목소리 담는다
18일 고위 당국자에 따르면 최근 미국의 확장억제 정책에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한 양국간 협의가 근래에 개시돼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 해당 협의는 확장억제와 관련해 정보공유, 공동기획, 위기협의, 연합연습, 전략자산전개를 비롯 총 6개 범주로 나뉘어 진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확장억제 정책의 기획부터 운용에 이르는 주요 분야전반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된 셈이다.
이는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가 지난해 2월 발표한 ‘핵확산방지와 미국 동맹국 안정’보고서를 통해 제안했던 방안과도 방향이 흡사하다. 해당 보고서는 “미국은 아시아 핵기획그룹(ANPG, Asian Nuclear Planning Group)을 만들어 호주, 일본, 한국을 미국의 핵 기획 절차에 참여시키고 이 동맹국들이 미국 핵전력과 관련된 특정 정책을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이는 나토 회원국들이 운용하는 핵기획그룹(NPG)을 벤치마킹한 아이디어로 풀이된다. NPG는 미국과 유럽 나토 회원국 국방장관들이 핵무기 정책 구상, 배치, 운용 등을 협의를 하는 기구다. NPG는 미국의 핵우산 이행에 대한 유럽 동맹국들의 불신이 고조됨에 따라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66년 12월 방위기획위원회(DPC) 산하에 창설됐다. NPG는 1977년 창설된 고위그룹(HLG)으로부터 핵문제에 관한 각종 기술적 자문을 받아 의사결정을 한다. 현재 유럽의 나토 회원국중 미국과 핵공유체결을 맺은 5개국(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튀르키에, 벨기에)에 미국의 전술핵이 배치돼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미국의 전술핵 무기를 나토식으로 공유하려면 먼저 미국, 일본, 호주와의 양자 및 다자간 외교적 신뢰 및 안보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장기적으로 동북아에 집단안보체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침 한미관계 뿐 아니라 한-호주간 안보협력은 윤석열 정부 출범후 한층 급물살을 타고 있다. 윤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복원도 적극 시도하고 있다.
◆나토식 핵공유 실효성은
미국이 동북아 동맹국들과 핵공유를 해야 한다는 의견은 사실 10여년전에도 제기됐던 아이디어다. 부루킹스연구소의 리차드 C. 부시(Richard C. Bush) 박사는 2011년 발표한 '동북아에서의 미국 확장억제 정책:역사, 현황, 그리고 시사점'보고서에서 "중국, 북한, 그리고 미국 속내의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일부 미국 동맹들은 전시에 핵무기가 어떻게 사용될지 동맹내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들이 함께 논의하는 나토 핵기획그룹과 유사한 메커니즘의 창설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논의가 예전부터 학계에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효성 논란으로 인해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 호주 정부 모두 신중한 입장을 고수해왔다. 군의 한 관계자는 “미국이 그동안 나토에 공유했던 전술핵무기는 핵미사일이 아니라 주로 장거리 전략폭격기에 싣고 투하하는 핵폭탄이었다”며 “이는 표적까지 광활한 대륙을 가로질러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는 유럽의 사정에는 맞을지 모르지만 종심이 짧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과 북한의 촘촘한 방공망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전진 배치해봐야 효용성이 크지 않은 무기”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이 B-52 폭격기에 전술핵폭탄(B61-7 및 B83-1 핵폭탄)뿐 아니라 최대 사거리 1600km, 추정 속도 마하 5이상의 극초음속 공대지미사일(AGM-183A)도 장착할 수 있게 되면 이 같은 효용성 논란을 의미가 없게 됐다. B-52 폭격기가 굳이 북한 근처에까지 가지 않아도 평양으로부터 1600km 지점인 일본 규슈 이남의 필리핀해에서 핵탄두를 탑재한 AGM-183A을 발사하면 약 16분 내에 북한 지휘부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범철 국방부 차관이 이번 고위급 EDSCG 참석에 앞서 지난 15일 미국 매릴랜드주의 앤드루스 합동기지를 방문하자 미국측은 B-52 폭격기을 보여주고 저위력핵무기 운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나토식 핵계획그룹 창설 및 핵공유가 미국 확장억제 이행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좋은 대안이라고 지적해왔다. 저명한 핵전문가인 미라 랩 후퍼(Mira Rapp-Hooper) 박사는 지난 2020년 4월 28일 국립아시아연구소(NBR)와 가진 '한미동맹의 확장억제'대담에서 “미국은 소련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냉전 기간 동안 나토와 매우 효과적인 동맹을 계속 유지했다”며 “워싱턴(미국 정부)이 한 것은 본질적으로 나토를 통해 핵기획그룹과 같은 새로운 정치적 메커니즘을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민병권 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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