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발(發) 에너지 금수 조치로 유럽 경제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량 감소와 탈원전 정책의 여파로 석탄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럽이 ‘서방 경제의 제3세계’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유럽 물가는 폭등하고 있다. 지난달 10.1%를 기록한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내년 초 18%대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도 인플레이션이 70년 만에 처음으로 두 자릿수를 기록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해 에너지 수입을 금지했다. 강력한 대(對)러 제재가 유럽 경제를 침체에 빠뜨리는 자충수가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로·파운드 가격 추락, 석탄 의존도 커져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 등에 따르면 최근 유럽 증시는 서방 경제권에서 가장 부진했다.
연초 대비 22% 폭락하면서 미국 증시보다 10%포인트 가까이 더 떨어졌다. 심지어 일부 신흥국 증시보다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포브스는 러시아를 겨냥한 서방의 에너지 제재가 물가 상승 요인이라고 봤다.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여파로 유럽 경제를 선도하는 영국과 독일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멕시코보다도 높아졌다고 전했다.
통화 가치도 급락했다. 30일 기준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달러당 0.85파운드로 3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로화 가치도 유로·달러 패리티(유로화와 달러화의 1대1 등가 교환)를 기록할 정도로 하락했다.
최근 씨티은행이 내년 1월 영국의 CPI가 18.6%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파운드화의 하락세가 가팔라졌다.
CPI가 18%를 넘어선다면 1976년 석유파동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당시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씨티은행에 따르면, 영국의 전기·가스 규제기관인 오프젬은 현재 표준 가구 기준 연 1971파운드(약 311만원)에서 내년 4월 5816파운드(약 920만원)로 전기·가스요금 상한을 높일 것으로 보인다.
요아힘 나겔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 총재도 올가을 독일의 물가 상승률이 7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의 전기 가격은 전년 대비 7배가 올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7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37.2% 올라 역대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요인은 에너지값 상승이었다.
유럽의 최대 가스 공급국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국들이 대(對)러 제재를 본격화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천연가스 공급을 줄였다.
지난 6월부터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은 유럽으로 연결되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을 통한 천연가스 공급량을 가스관 용량의 40%로 줄였고, 지난달 27일에는 20%로 축소했다. 최근 가스프롬은 노르트스트림-1의 유지·보수 명목으로 31일부터 3일간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정비를 마치면 현행대로 하루 3천300만㎥ 규모의 가스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수송량 대비 20%인 기존 공급 규모를 유지하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유럽행 가스 공급이 아예 중단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천연가스 선물 가격이 급등했다.
겨울철 에너지 대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러시아가 천연가스 공급을 줄이자 유럽은 석탄 수입을 늘이는 중이다.
지난 5월 기준 미국의 대유럽 석탄 수출 물량은 작년 동기 대비 140% 급증했다.
포브스는 미국석탄수출연합회(USCEC)를 인용하면서 미국이 오는 10월까지 유럽으로 석탄 수출 물량을 더 확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USCEC는 "유럽은 이번 겨울에 전 대륙에 걸친 전력 부족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원전 생산량 70%프랑스도 에너지 위기, 독일 녹색당 여전히 원전 반대
유럽의 에너지 수급 불안은 유럽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 등 많은 유럽국이 탈원전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을 중단에 대한 대책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뒤늦게 미국·카타르 등지에서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늘렸지만 유럽 내에 LNG 저장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
상대적으로 원자력 의존도가 높은 프랑스도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조치에 뚜렷한 타개책이 없는 상황이다. 엘리자베스 보른 프랑스 총리는 에너지 배급제가 시행될 가능성도 시사했다.
‘유럽 내 탈원전의 선두주자’ 독일은 러시아 가스 중단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독일 연방의회는 물론 유럽의회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독일 녹색당은 여전히 원전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녹색당은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독일 연정의 파트너이며 2019년 5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74석의 의석(전체 의석의 9.9%)을 확보해 영향력이 크다.
또한 독일은 유럽의회에서도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많은 의석(96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녹색당이 EU 전체의 정책 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원자력·천연가스·태양광 등으로 충분한 전력 생산이 어려워지자 독일은 환경오염 물질을 다량으로 배출하는 석탄 발전 비중을 높이고 있다.
트레이드 데이터 모니터에 따르면 지난 3∼5월 독일은 호주산 석탄 수입량을 21% 늘렸다. 같은 기간 남아프리카공화국산 석탄 수입량은 7배 급증했다.
블라디미르 시뇨렐리 브레턴우즈리서치 책임연구원은 포브스에 "독일 녹색당은 여전히 원전을 반대하는데 난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 "그들은 제3세계 에너지 프로그램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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