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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꼬마 캐디와 20세 아마골퍼가 쓴 동화 같은 실화[골프 트리비아]

1913년 US 오픈 제패한 위멧과 라워리 이야기

당대 천하무적 바든과 레이 상대 연장 끝 우승

골프 사상 최고의 이변…미국 골프 성장 계기

평생 친구로 지낸 뒤 둘 다 ‘명예의 전당’ 헌액

1913년 US 오픈 우승 뒤 프란시스 위멧(뒤 가운데)과 꼬마 캐디 에디 라워리(앞 가운데)가 관중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해리 바든(왼쪽부터), 프란시스 위멧, 테드 레이. AP연합뉴스


프란시스 위멧의 백을 메고 있는 에디 라워리. 출처=캐디 명예의 전당


더 컨트리 클럽 17번 홀 옆에 있던 프란시스 위멧의 집. 위멧은 1913년 US 오픈 최종 라운드 17번 홀에서 공동 선두가 되는 버디를 잡았다. 출처=USGA


1913년 9월 16일 아침.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루클라인의 스무 살 청년 프란시스 위멧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길 건너 ‘더 컨트리 클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틀 뒤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골프 대회인 US 오픈이 열릴 예정이었다. 더 컨트리 클럽은 위멧이 열 한 살 때부터 캐디를 했던 곳이다.

US 오픈을 앞두고 미국골프협회(USGA) 회장인 로버트 왓슨은 위멧에게 출전을 권했다. 위멧은 앞서 9월 초 열린 US 아마추어에서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왓슨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터였다. 왓슨에게는 브루클라인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US 오픈에 그 지역 선수를 출전시키는 것도 좋은 명분이었다. 위멧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이미 US 아마추어에 참가하느라 가게 일을 며칠 빼 먹었기 때문이었다. 위멧의 집안은 가난했다. 위멧의 아버지는 고등학생이던 그에게 “골프를 때려 치우고 인생에 쓸모 있는 일을 하라”고 질책할 정도였다. 결국 학교를 그만 둔 위멧은 스포츠 용품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왓슨이 가게 사장과 합의를 본 덕에 위멧은 US 오픈에 나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선전부터 일이 꼬였다. 캐디를 하기로 했던 잭 라워리가 일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잭의 동생인 열 살 짜리 꼬마 에디 라워리가 백을 메겠다고 나섰다. 라워리는 키가 작아 때론 백이 땅에 질질 끌릴 정도였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위멧은 그에게 백을 맡기기로 했다.

위멧은 손쉽게 예선을 통과했지만 본선은 얘기가 달랐다. 영국의 해리 바든과 테드 레이가 참가했기 때문이다. 바든은 이미 그때 디 오픈을 다섯 차례나 제패한 천하무적이었고 레이는 전년도 디 오픈 챔피언이었다. 당초 6월에 열릴 예정이던 US 오픈이 이 둘의 일정에 맞추느라 개최 시기를 9월로 옮겼으니 그들의 위상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하루에 36홀씩 돌았다. 첫날 1·2라운드가 끝났을 때 위멧은 바든에 4타 뒤졌다. 3라운드에서는 데일리 베스트인 74타를 치면서 바든, 레이와 동타를 이뤘다. 동네 아마추어 골퍼가 영국 챔피언들을 상대로 우승을 다툰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최종 4라운드에서 6홀을 남겨두고 위멧은 선두에 2타 뒤져 있었다. 위멧이 13번 홀에서 칩인 버디를 잡자 갤러리의 함성이 코스에 가득 퍼졌다. 위멧은 드디어 자신의 2층 침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17번 홀에서 6m 버디를 잡으며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버디를 잡으면 우승할 수 있었지만 파에 그치면서 바든, 레이와 동타가 됐다.

US 오픈 연장전은 다음 날 18홀을 도는 방식이었다. 한 명의 다윗이 두 명의 골리앗에 대적하는 이 연장전을 보기 위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아침, 2만 명이 넘는 구경꾼이 몰렸다. USGA는 위멧에게 경험 풍부한 캐디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꼬마 라워리와의 의리를 선택했다. 둘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10번 홀부터 앞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18홀을 마쳤을 때 위멧이 72타, 바든은 77타, 레이는 78타를 기록했다.

위멧은 영웅이 됐다. 관중은 US 오픈 최초의 아마추어 챔피언인 위멧과 우승의 조력자 라워리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마치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미국 신문들은 일제히 1면 톱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이들의 우승은 지금까지도 골프 사상 최고의 이변으로 여겨진다. 위멧이 우승하던 그해 미국의 골프 인구는 35만 명이었지만 10년 후에는 200만 명으로 늘었다. 골프의 중심은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둘은 훗날 어떻게 됐을까. 끝까지 아마추어로 남았던 위멧은 미국인 최초로 세인트앤드루스의 ‘로열 앤드 에이션트 골프 클럽’ 수장에 올랐고 1974년에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자동차 판매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라워리는 여러 유명 골퍼들을 후원하면서 USGA 이사회 멤버로도 봉사했다. 역시 ‘캐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위멧과 라워리는 평생 친구로 지냈다. 1967년 위멧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관을 운구하던 사람 중에는 라워리도 있었다. 이들의 얘기는 영화(The Greatest Game Ever Played)로도 만들어졌다. 둘의 전설이 깃든 더 컨트리 클럽에서 122회 US 오픈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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