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점을 라틴어로 표현한 용어가 몇 개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호모 사피엔스’이고, 다른 하나는 ‘호모 로쿠엔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 혹은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18세기 중반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의 저서에서 처음 보인다. ‘호모 로쿠엔스’는 ‘말하는 인간’ 또는 ‘언어적 인간’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데 20세기 영국의 음성학자인 데니스 버틀러 프라이가 인간을 그렇게 정의한 데서 비롯됐다. 두 개념 사이에는 100년도 넘는 간격이 있다. 그러나 그 사이인 19세기 초 찰스 다윈은 매우 복잡한 소리를 생각과 결부시키는 인간의 능력을 다른 동물과의 차이로 지적하기도 했다.
필자가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로쿠엔스를 같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언어가 정제돼 있어야 합리적인 사유를 할 수 있고, 합리적인 사유를 할 수 있어야 말과 글이 바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 즉 생각을 한다. 만일 언어가 체계적으로 정돈돼 있지 않다면 어떤 논리적인 생각도 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인도의 살라투스 파니니는 기원전 4세기에 산스크리트어의 문법을 집필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문장을 구성하는 주어·서술어·보어 등의 성분을 찾고, 단어의 품사를 나누는 등 문법을 완성했다. 그 후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정리한 언어로 문헌학을 연구하고, 인간 자체와 삶에 대해 사유하고 토론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경구를 남긴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도 정제된 언어가 있어 생각이 가능했을 테다. 이처럼 우리들이 선조들의 사유와 토론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남긴 언어적 결과물, 즉 말과 글이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능력이 바탕이 된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현대사회에서 귀하게 평가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은 암기력이나 기억력이 아니다. 창의력과 논리력이다. 창의력은 남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상을 꿈꾸게 하는 능력이고, 논리력은 합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해서 나와 같이 생각하고 주장하게 하는 힘이다. 논리력은 학습으로 쉽게 키울 수 있다.
논리력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국가를 이끄는 인재들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탕 하나를 두고 왜 상대방이 아닌 내가 먹어야 하는지 다투는 어린아이에게도 필요하고, 집으로 배달된 비싼 전자제품에 딸려 온 사용설명서를 읽고 기계를 잘 작동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부부 싸움에서 내 주장이 약하다고 느낄 때 다짜고짜 “근데 왜 소리를 질러? 나 말 안 해!” 하고 논점을 벗어나는 사람에게 특히 필요하다. 논리력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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