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항상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는 이른바 ‘호모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라면 어떨까. 은퇴를 대비해 당연히 젊은 시절부터 꾸준하게 저축하고 투자할 것이다. 연금 자산을 은행 정기예금에 방치하기보다는 최적의 투자 포트폴리오로 운용하고 적절하게 조정해 수익률을 높일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분명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91%가 노후 준비에 대해 보통 혹은 부족하다고 답한 반면 8.9%만이 잘 돼 있다고 했다. 고용노동부(2020년 말)에 따르면 적립금의 89.3%를 정기예금 등 원리금보장형에 맡기고 불과 10.7%를 펀드 등 실적배당형에 투자했다. 금융투자협회(2018년)에 따르면 확정기여형(DC) 가입자의 83%가 1년 이내에 상품 변경을 하지 않고 평균 3년에 한 번 정도만 변경한다. 결국 우리는 호모이코노미쿠스가 아니라 그저 호모사피엔스일 뿐이다.
퇴직연금이 낮은 운용 수익률 등으로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에서 올해 7월 시행될 디폴트옵션(사전 지정 운용)이 큰 분기점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디폴트옵션은 근로자의 운용 지시가 없을 경우 가입자가 사전에 정해놓은 방법으로 운용하는 제도이다. ‘운용에 특별히 관심이 없고 귀찮은 호모사피엔스’를 위한 것이다. 미국이나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에서도 디폴트옵션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
다만 디폴트옵션이 제도 도입의 취지를 살려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제 조건이 있다. 첫째, 은행·증권·보험사 등 퇴직연금 사업자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 의무와 충실 의무를 지금보다 더욱 강화해야 한다. 디폴트옵션은 사업자가 그 방법을 기업의 사용자에게 제시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로 방법을 설정해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받아 규약에 반영하도록 돼 있다. 현실상 실질적인 관리와 운영의 중대한 역할을 사업자가 맡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디폴트옵션을 계열사 상품으로만 구성한다면 가입자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어서 이를 적극 방지해야 한다.
둘째, 퇴직연금이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중도 인출 없이 은퇴 시점까지 계속적으로 운용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지금도 중도 인출에 대한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호주 등에 비하면 상당히 느슨하다. 디폴트옵션으로 펀드와 같은 실적배당형 상품이 도입될 경우 중도 인출 없이 장기적으로 운용돼야만 단기 변동에 따른 원금 손실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셋째, 디폴트옵션제도의 도입 목적에 맞도록 투자 포트폴리오를 활성화하고 이에 대한 모니터링과 관리를 강화하도록 해야 한다. 디폴트옵션의 목적은 투자 상품과 자산 운용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관심이 없는 가입자를 도와주려는 데 있다. 만일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만 디폴트옵션을 선택한다면 제도 도입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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