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의 원인은 서방에 있다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東進)을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유럽의 가스 가격 폭등에 대해서는 “서방이 원인을 제공했을 뿐 우리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했다.
23일(현지 시간) 모스크바타임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에서 열린 연례 연말 기자회견에서 과거 미국은 나토의 동진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나토는 계속 확장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나토는 우리를 속였다”며 “우리가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나 여타 국가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위협이 되는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여타 국가들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우리의 현관에 로켓을 배치하고 있다”며 “만약 우리가 미국과 캐나다 또는 멕시코 국경 인근에 로켓을 보낸다면 미국이 어떻게 반응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어 “우리가 그들(서방)의 국경에 접근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우리의 국경에 접근했다”며 “우리는 우리의 안보를 보장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또 “나토의 동진은 없어야 한다”며 “공은 그들의 코트에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답을 줘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상황을 묻는 질문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위협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내 극단주의자들이 크림반도 탈환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언제 그들이 공격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접경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천연가스 이슈와 관련해서도 서방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량을 의도적으로 조절한다는 의혹이 있다는 질문에 푸틴 대통령은 “그런 비난은 사실이 아니다. 서방은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최근 유럽 내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한 것은 가스프롬의 책임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유럽이 고정된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받기를 원한다면 장기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장기 계약을 할 경우 가스 가격이 3~4배, 심지어 7배까지 저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가스프롬이 야말~유럽 가스관 수송 물량 경매에 불참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구매자가 구매 주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은 서방과의 대화 의지도 드러냈다. 그는 앞서 제안한 안보보장안 초안에 대해 “미국이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미국 측 파트너들이 내년 초 제네바에서 회담을 시작할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이미 양측 대표단도 정해졌다고 덧붙였다. 앞서 러시아는 △나토는 우크라이나를 가입시키지 않고 △동진하지 않으며 △1997년 이후 가입한 폴란드와 헝가리 등 유럽 국가들에 배치된 나토군을 철수하라는 내용이 담긴 안보보장안 초안을 미국과 나토에 제안한 상태다.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 대통령은 총리를 지냈던 4년간을 제외하고 2001년부터 매년 이 같은 대규모 기자회견을 개최해왔다. 이 기자회견은 장시간 진행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2004년 이후 열린 기자회견은 모두 3시간 이상이었으며 2008년에는 4시간 40분간, 지난해에는 4시간 30분간 진행되며 최장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화상으로 열린 지난해 기자회견과 달리 올해 회견은 대면으로 진행됐다. 타스통신은 그간의 기자회견에는 1,000여 명이 참석했지만 올해는 코로나19에 따른 인원 제한으로 507명만 참석했다고 전했다. 현지 시간으로 이날 정오에 시작된 기자회견은 오후 4시를 넘겨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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