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가리며 솟은 주황빛 구름이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마치 액자 위에 걸터앉은 듯 화면 아래 끄트머리에 돌아앉은 여성이 저 멀리 광야를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 쪽에는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두 사람과 수레가 보인다. ‘초현실주의’의 천재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7)가 1933년에 그린 ‘슈가 스핑크스’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작품이다. 코 앞까지 다가서야 겨우 보이는 두 인물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 속 농부 부부와 같은 자세다. 목가적 풍경의 ‘만종’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화 중 하나로 꼽히지만 달리에게는 달랐다.
“밀레의 ‘만종’에서 꼼짝 않고 서서 기도하는 두 인물의 실루엣은 몇 년 동안이나 나를 쫓아다니면서 지속적이고 모호한 위기감을 유발시켰다…내가 본 작품 중 가장 강렬하고 깊이 있으며, 무의식적인 생각을 자극하는 그림이다.”
1932년 6월, ‘만종’에 잠재된 작가의 다른 의도가 느껴지면서 달리는 자신의 다른 작품 곳곳에 그림자 형태, 인물상, 돌조각, 구름, 그림 속 그림 등으로 ‘만종’의 부부를 등장시켰다. 달리에게는 남다른 가족사가 있다. 달리가 태어나기 9개월 전에 세 살 남짓한 형이 죽었고, 부모는 환생한 아이를 다시 만나기라도 한 듯 죽은 아이의 이름을 그대로 동생 달리에게 붙여줬다. 달리는 어머니를 따라 간 형의 무덤에서 종종 자신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묘비명을 봤고, ‘죽지 않은’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기행을 일삼았다. 어쩌면 ‘만종’의 부부에게서 자신의 부모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훗날 루브르박물관의 보존과학팀이 ‘만종’의 스케치에서 부부 사이에 놓인 작은 관(棺)을 발견한 것을 고려할 때, 달리는 이미지 이면의 무의식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핵심은 등 돌린 여성. 달리가 평생을 두고 유일하게 사랑한 여성 ‘갈라’다. 달리보다 10살 많은 유부녀였던 갈라는 다재다능한 달리에게 단숨에 반했고 딸과 남편을 버린 채 달리와 결혼했다. 이후 그녀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까지 50년 이상 달리는 다양하게 ‘갈라’를 그렸다.
단 한 점으로 달리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슈가 스핑크스’를 비롯한 달리의 주요 작품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왔다. 달리의 국내 첫 공식 회고전인 ‘살바도르 달리: 이매지네이션과 리얼리티’가 지난 27일 DDP 배움터 디자인전시관에서 개막했다. 국내 기획사 GNC미디어와 살바도르 달리 재단의 공식 협업으로 성사된 전시다. ‘세계 3대 달리 미술관’ 중 하나이며 달리의 무덤이 지하에 안치돼 있는 스페인 피게레스의 ‘달리 미술관(Fundacio Gala-Salvador Dali)’을 중심으로 미국 플로리다의 살바도르 달리 미술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 소장품 총 140여 점을 선보였다.
초현실주의는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오토마티즘’ 기법을 강조했지만 달리는 꿈을 그려내고자 애썼고 자신 만의 ‘편집광적 비판’이란 기법을 창안했다. 무의식의 장면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해 마치 생생한 꿈을 보여주듯 기이한 화면을 이루는 방식이다. 그래서 달리의 그림에는 수수께끼같은 사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기억의 지속’(1931)에 등장하는 녹아내리는 시계가 대표적인데, 이는 시간 흐름의 상대성과 실존적인 고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엄청난 권력과 엄숙함이 느껴진다”고 했던 Y자형 목발, “시간을 먹는 위대한 존재”라고 했던 개미떼, “현실적인 미덕을 가장 많이 함축한 오브제”라고 했지만 페티시즘과 에로티시즘의 함축적 의미로 즐겨 사용한 신발 등이 단골 소재였다. 학교 창밖으로 종일 바라보곤 했던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음·고독·우울·환영을 상징한다.
커다란 흉상이면서 동시에 부유한 상인(商人)들의 군상이기도 한 ‘볼테르의 흉상’, 나폴레옹의 얼굴처럼 보이지만 서 있는 여성과 그의 그림자가 이뤄낸 풍경인 ‘임신한 여성이 된 나폴레옹의 코…’ 등의 작품은 숨은그림찾기처럼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샘솟는다. ‘돈키호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그린 달리의 삽화, 가구·커튼 등을 배치한 방 전체가 1920년대 인기 여배우의 얼굴을 이룬 공감각적 설치작품 ‘메이 웨스트(Mae West)’도 만날 수 있다. 내년 3월20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초현실주의 거장’전이 한창이다. 초현실주의 작품 컬렉션으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180여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등돌리고 선 남성이 거울 속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1937년작 ‘금지된 재현’을 비롯해 초현실주의를 정의하고 선언한 앙드레 브르통의 저작물, 만 레이·막스 에른스트·마르셀 뒤샹 등 주요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고루 감상할 수 있다. 내년 3월6일까지.
지난해 마그리트에 이어 올해 달리 전시를 기획한 정용석 GNC미디어 부사장은 “세계대전 후 시작된 ‘초현실주의’ 운동은 부르주아·엘리트·물질주의를 비롯한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에서 탄생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문명 재편에 가까운 전환기를 사는 현대인들이 초현실주의자들의 상상력, 본성을 자유롭게 구현한 달리의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