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치적은 외교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반공’을 정치 생명 연장의 도구로 활용해온 전임자들과 달리 노 전 대통령은 ‘북방 정책’이라는 개념을 한국 외교에 주도적으로 도입해 북한의 절대 우방이자 우리와는 적대 관계였던 소련·중공으로 눈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외교 정책은 지난 1988년 취임사에서부터 드러났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우리와 교류가 없던 저 대륙 국가에도 국제 협력의 통로를 넓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교류가 없던 저 대륙 국가’. 바로 소련과 중공을 일컫는 표현이었다. 분단과 냉전이라는 엄혹한 현실을 한 번 뛰어보겠다는 선언이었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첫해 열린 88 서울하계올림픽·패럴림픽은 북방 외교의 도약대가 됐다. 소련·중공은 물론 동유럽·아프리카·중남미 등지의 공산권 국가들은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온갖 획책으로 공산권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발전상이 제대로 노출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산권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1989년 2월 헝가리, 같은 해 11월 폴란드와 공식 수교를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외교사의 초대형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대형 이벤트도 열렸다. 1990년 6월 미국 한복판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직접 대면한 것이다.
첫 만남이 어려웠을 뿐 한국과 소련의 수교를 위한 절차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해 9월 한국은 소련과의 국교를 공식 수립했다. 두 달 후에는 노 전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이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이듬해 4월 한국을 답방했다. 북한도 한 번 간 적이 없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한국부터 방문한 것이다. 한국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 의제는 묵직했다. 한국의 유엔 가입 문제에서부터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 안전 협정 서명, 북한 개방 등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을 위한 구체적인 의제들이 집중 논의됐다.
소련과의 급진적인 관계 개선은 한국에 대한 중공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결국 한국과 중공은 1992년 8월 국교를 수립했다. 특히 한중 수교는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됐다. 1992년 63억 8,0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양국 교역 규모는 20년 만에 35배나 늘어난 2,206억 2,000만 달러 수준으로 폭증했다.
이처럼 북방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수교국은 30개국이 더 늘어 총 130개국이 됐다. 이 같은 탈(脫)냉전이라는 국제 정세의 급변 속에 대북 문제도 전향적으로 풀어갔다. 취임 초 남북한 교역 문호 개방 등 6개항으로 구성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7·7 선언으로 불리는 이 발표를 북한과의 직교역 및 이산가족 왕래, 외교적 상호 협조 등 남북 교류 협력의 물꼬를 튼 중대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듬해인 1989년 노 전 대통령은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특별 연설을 통해 남북 간 상호 대화를 통한 신뢰 구축을 내용으로 하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안하는 등 남북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노 전 대통령이 1991년 11월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남북 관계에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조지 H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1991년 소련과의 ‘전략무기 감축 협정(START)’ 타결의 연장선상에서 주한 미군에 배치된 전술핵을 철수하자 노 전 대통령은 핵무기의 부재까지 선언했다.
이러한 노력은 남한과 북한 정부 대표가 1991년 12월 남북 간 화해, 불가침, 교류 협력을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것으로 결실을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라는 성과도 이끌어냈다. 특히 노태우 정부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이끌기 위해 남북 교역 및 북한 주민 접촉을 합법화하는 남북교류협력법 및 남북협력기금법등을 제정해 이후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남북 교류 협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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