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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리 유적·미륵사지...백제의 영욕을 엿보다

[休-전북 익산]

한쪽 무너진 상태로 서 있는 미륵사지 석탑

국내 최대·백제 最古 석탑으로 사료적 가치

용화산 남쪽 끝에 위치한 왕궁리 유적지엔

우뚝선 5층 석탑이 1,400년전 왕궁터 지켜

왕궁리유적지는 소재지명인 왕궁면과 연관돼 왕궁터로 인식돼 왔으나 발굴 조사를 통해 백제 무왕대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고등학교들이 가장 선호하는 수학여행지는 경주다. 경주가 첫손가락에 꼽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신라시대 왕릉을 비롯해 많은 유적들이 보존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주 일대는 첨성대·불국사 등 오랜 세월을 견뎌 온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산재하는, 그야말로 신라 문화유산의 보고다.

그에 비해 백제 유적은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백제 역사의 중심지라 불리는 부여를 가 봐도 몇몇 유적을 제외하면 최근에 재현된 왕궁과 촌락들이 그저 옛날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백제 유적이 빈약한 이유는 명확하다.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됐기 때문이다. 패전국인 백제의 유적과 문화재는 파괴됐거나 불에 소실됐다. 이는 비단 한반도의 고대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세계 어느 지역을 가 봐도 영화를 누리는 것은 승자의 유산들이다.

하지만 전라북도 익산은 백제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계절을 따라 이곳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가로수의 나뭇잎에 이제 겨우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한 익산의 도로를 따라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미륵사지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한쪽이 무너진 미륵사지 석탑이 먼발치로 보였다.

미륵사지 석탑이 절반가량 무너졌음에도 사료적 가치를 평가 받는 것은 이것이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인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2009년 1월 해체 수리 중에 탑신 내부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사리장엄구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족집게 1점, 유리구슬 등이 들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40년)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밝혀져 일대가 백제 무왕의 근거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절반가량 무너진 이 석탑이 사료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인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를 포함해 동북측으로 6층까지만 남아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큰 규모의 탑으로서의 사료적 가치에 더해 양식 면에서는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볼 수 있어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을 유추하는 근거가 된다.

익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유적은 왕궁리유적지다. 용화산 남쪽 끝 구릉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이 백제의 궁성터라는 기록은 없었다. 그저 김정호의 ‘익산 별도(別都)’와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의 ‘백제 무왕 지모밀지(枳慕蜜地) 천도’ 기록이 왕궁리유적 소재지인 왕궁면과 연관돼 왕궁터로 인식된 정도였다.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무왕 대에 조성된 사실이 밝혀졌으며 최근 조사에서는 전각 건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백제 정원 시설 등의 궁성 관련 유구가 확인되고 총 1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백제 왕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왕굴리유적을 찾은 어린이들이 석탑 주변을 뛰어놀고 있다.


오래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석탑을 중심으로 그저 허허벌판이었지만 이제는 주변에 주차장이 조성되고 궁성을 구역별로 나눠 상세한 설명을 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왕궁리 5층 석탑은 1965년까지는 기단부가 흙에 묻혀 있어서 토단(土壇)을 갖춘 석탑으로 여겨졌으나 돌로 만든 기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그대로 복원됐다. 왕궁리 5층 석탑은 보물 제44호로 지정됐다가 1996년 11월 29일 ‘일제지정문화재 재평가 사업’ 심의 후 국보 제289로 승격됐다.

미륵사지 동탑(오른쪽)은 7층 또는 9층으로 추정됐는데 복원 설계 중에 9층이었음을 알려주는 부자재가 발견돼 9층으로 복원됐다.


익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에 왕궁리와 미륵사지를 다시 찾았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차 안에서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마침내 미륵사지 동탑의 오른쪽부터 밝아지더니 해가 떠오르며 미륵사지 석탑과 동탑이 모습을 드러났다. 미륵사지 동탑은 1991년 문화재관리국 주관으로 새로 조성된 것으로 온전한 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탑은 당초 7층 또는 9층으로 추정됐는데 복원 설계 중 9층이었음을 알려주는 부자재가 발견됨에 따라 9층으로 복원됐다.

여명을 뒤집어쓴 2개의 탑과 일대에서 발굴돼 줄지어 누워 있는 돌더미들은 부산스러운 기자의 발걸음에도 잠을 깨지 않았다. /글·사진(익산)=우현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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