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한국 정치사에 유례없는 거대 정당을 만들었다. 3당 합당은 한국 거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뿌리가 됐고 정치적 야합의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3명의 대통령을 낳는 역사적 사건이 됐다.
1987년 전두환을 몰아낼 정도로 거셌던 민주화 태풍은 군인 출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피해갔다. 태풍의 경로를 튼 건 민주화 이후 분출한 ‘지역주의’였다. 민주화 이후 야당의 거물이었던 양김(김영삼·김대중)은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며 분열했다.
김대중은 ‘4자 필승론’을 꿈꿨다. 노태우는 대구경북(TK)에서, 김영삼은 부산경남(PK)에서 김종필은 충청에서 유리하지만 본인은 호남과 수도권에서 강점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 공식은 대통령 선거에서 ‘4자 필패론’이 됐고 분열의 틈을 타고 노태우는 36%라는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오른다. 하지만 여론의 반작용은 컸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35석) 등 야 3당이 164석을 차지해 노태우의 민주정의당(125석)을 누르는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다. 야권이 커지자 그간 억눌려있던 5·18 민주화운동과 언론통폐합, 군사정권의 만행을 파헤치기 위한 목소리가 분출했고 민정당은 흔들렸다.
노태우는 이때 ‘3당 합당’을 꺼내며 정치지형을 송두리째 바꿨다. 김종필과 내각제 개헌의 입을 맞춘 노태우는 제2 야당을 이끄는 김영삼에 합당을 제안했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가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3당 합당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합친 3당은 217석, 헌정사상 가장 거대한 보수여당 ‘민주자유당’으로 탄생했다. 보수정당에 군사정권의 후예인 민정계, 민주화 출신의 민주계, 내각제의 공화계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정치사의 획을 그은 3당 합당은 많은 거물을 낳았다. 김영삼은 호랑이를 잡았다. 민주계를 이끌고 민자당의 총재가 됐고 14대 대선에 나가 대통령이 됐다. 거물들은 승리공식이 분열이 아닌 야합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대선에서 지고 정계를 은퇴했다 돌아온 김대중은 15대 총선에서도 참패한다. 김대중은 약속한 내각제 개헌을 헌신짝처럼 버린 김영삼에 앙금이 있던 김종필에 손을 내민다. 그렇게 탄생한 ‘DJP연합’은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16대)도 3당 합당이 낳았다. 1990년 1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마포 당사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3당 합당을 발표하자 당시 의원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이의있습니다, 반대 토론 해야합니다”라고 외쳤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계로 정치권에 몸담았다. 하지만 김영삼 총재가 “고뇌했다”며 밝힌 3당 합당을 그 자리에서 반대한다고 외쳤다. 묵살되자 “(반대 토론이 없는) 이것이 어찌 회의인가”라며 삿대질을 하며 반발했다. 노무현은 김영삼을 등지고 탈당했다. 이후 평민당에 합류해 김대중을 이어 민주계 대통령이 됐다.
3당 합당은 한국 사회에 ‘대결적 지역주의’라는 치유할 수 없는 병도 남겼다. 13대 대선의 4자 필승론에서 ‘TK-PK-호남-충청’으로 나눴던 지역 구도는 3당 합당 이후 호남 대 비호남으로 굳어졌다. 호남을 기반으로 한 15대와 16대 대선을 지나며 호남대 비호남은 ‘호남 대 영남’으로 변했고 두 지역은 서로 반목하는 정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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